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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죽문(看竹門)

풍산류씨 충효당豊山柳氏 忠孝堂

28.4×65.8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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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간죽문(看竹門)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28.4×65.8
  • 건물명 간죽문(看竹門)
  • 공간명 풍산류씨 충효당(豊山柳氏 忠孝堂)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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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죽문(看竹門)

간죽문(看竹門)



간죽문(看竹門)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20에 위치한 옥연정사(玉淵精舍) 서쪽 출입문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풍산류씨 충효당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65.8㎝, 세로 28.4㎝이다. 옥연정사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1586년에 건립한 서당으로, 류성룡이 국보 132호인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간죽(看竹)’은 중국 당(唐)나라 시인 왕유(王維, 699~759)의 「춘일여배적과신창리방려일인불우(春日與裴廸過新昌里訪呂逸人不遇)」에서 “대나무를 보고 주인이 누군지 물을 필요가 있는가?[看竹何須問主人]”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으로, 어느 집에 가서 그 집의 정취를 살피면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류성룡이 간죽문에 대해서 읊은 시가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看竹門前獨立久 홀로 간죽문에 앞에 한참 서 있으니
竹風蕭蕭吹短髮 대숲의 소슬바람 불어 백발을 날리네
落盡梅花不見人 매화꽃 다 져도 찾는 사람 하나 없고
山靑水綠沙如雪 산과 물은 푸르고 모래는 눈처럼 희네
류성룡이 옥연정사를 건립하게 된 것은 번잡한 세상의 번거로움을 피하여 자연을 벗 삼아 내면을 수양을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용대 자락에 위치한 이 정자는 고즈넉하기 그지없고, 옥연정 백사장에서 바라보는 하회마을 앞 만송(萬松)의 풍광이 더없이 아름답다. 류성룡은 옥연정사를 기점으로 해서 형님인 겸암 류운룡이 살던 겸암정사까지 경치가 빼어난 열 곳을 시로 읊조렸는데, 추월담(秋月潭)·달관대(達觀臺)·능파대(凌波臺)·쌍송애(雙松厓)·계선암(繫船巖)·도화천(桃花遷)·완심재(玩心齋)·간죽문(看竹門)·겸암사(謙巖舍)·지주암(砥柱巖)이 그것이다. 이는 자연경관 7곳과 건물 3곳을 읊은 것으로, 이태백(李太白)의 고숙십영(姑熟十詠)을 본뜬 것이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빠른 필속(筆速)으로 인하여 붓끝을 드러내며 힘찬 기운으로 쓴 글씨가 갈필(渴筆)까지 드러낸다. 마치 세찬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끝내 꺾이지 않는 대나무를 보는 것 같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풍산류씨 충효당(豊山柳氏 忠孝堂) 소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본관이 풍산(豐山), 자가 이현(而見), 호가 서애(西厓)이다. 그는 1542년(중종 37) 음력 10월 1일 아버지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과 어머니 안동김씨 김광수(金光粹)의 딸 사이에서 외가인 의성 사촌에서 출생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생원·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명종 2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1567년(명종 22)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9년(선종 2) 성균관전적과 공조좌랑을 거쳐 사헌부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홍문관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홍문관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88년(선조 21)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 올랐으며, 이듬해 사헌부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여러 차례 벼슬을 사직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疏)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였다. 1590년(선종 23) 우의정에 올랐고, 1591년(선종 24)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 정철(鄭澈)에 대한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해 같은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1592년(선종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무(軍務)를 총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에 올라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한 뒤 충청도·경상도·전라도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다.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해 군사를 총지휘했으며,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해 서로(西路)로 퇴각하는 것을 극구 만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94년(선종 27)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병서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講解)하였다. 또한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하고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 설치를 요청하는 등 명나라 및 일본과 화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군비를 보완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선조가 이순신이 군기(軍機)를 놓쳤다는 이유로 군법으로 처단한 다음, 원균으로 하여금 대신 맡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아뢰기를, “통제사의 직임은 이순신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지금 일이 급박한데 장수를 바꾸었다가 한산도를 지켜내지 못하게 될 경우, 호남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1598년(선종 31)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사건의 진상을 알리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작 되었다가 1600년(선조 33)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면서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징비록』의 징비(懲毖)는 『시경』에 “미리 징계하여, 후환이 없도록 조심한다.”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필사본인 이 『징비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 조정의 『진사일기』 등과 함께 임진왜란 연구에 절대로 빠트릴 수 없는 기록물 중 하나이다. 한편 필사본이던 이 『징비록』은 1647년(인조 25)에 외손인 경상도관찰사 조수익(趙壽益, 1596∼1674)에 의해 16권 7책의 목판본으로 간행되기도 하였다.

옥연정사는 1586년(선조 19)에 서애 류성룡이 45세 때 탄옹(誕弘) 스님에게 부탁하여 10년에 걸쳐서 지은 건물로 건물 배치는 오른편에서 대문채, 안채, 별당채, 사랑채로 되어 있고 건축 시 두리기둥을 사용하지 않고 모기둥을 사용하였다. 정사인 사랑채는 마루를 두고 좌우에 방을 두었는데 방은 완적재(玩寂齋), 마루는 원락재(遠樂齋)라 한다. 문간채는 왼편부터 측간, 대문, 광 3칸이고, 안채 8칸 겹집으로 일반 주택과는 다른 구조를 하고 있다. 별당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건물로 정방형 4칸 마루와 1칸 반 방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문간채를 제외하면 모든 건물이 팔작집이다.

참고문헌
  • 류성룡(柳成龍),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 안동문화원, 『안동오면 뵈줄게』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 상권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