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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敬齋)

진주정씨 우복종가晉州鄭氏 愚伏宗家

31.7×63.2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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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경재(敬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1.7×63.2
  • 건물명 경재(敬齋)
  • 공간명 진주정씨 우복종가(晉州鄭氏 愚伏宗家)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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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敬齋)

경재(敬齋)



경재(敬齋)는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1738~1816)가 강학을 목적으로 1809년(순조 9)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세운 도존당(道存堂)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경(敬)’은 내면의 흔들림을 털어내는 수양 방법으로, 주자는 ‘마음에 하나의 편견이 없으면서도 항상 경각 상태로 있으면서 어디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상태[主一無適]’라고 하였다. 마음이 욕심에 의해 무너지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사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경’의 상태를 유지하여 자신을 가다듬을 것을 강조한 말이다. ‘경(敬)’은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에서 “군자가 경(敬)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 일을 바르게 하니,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이 외롭지 않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라고 한 것에서 취하였다. 정종로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의 ‘무적(無適)’을 따서 자신의 별호로 삼을 정도로 ‘경’을 강조했는데, 이는 주자와 퇴계의 ‘주경(主敬)’ 사상에 기인하고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로 유려하면서도 힘이 넘친다.

붓끝에 응축된 기운이 느릿하게 움직이다가 머물다가 묵직한 흔적을 남기고 다시 움직이며 속도를 더해가다가 또 머물렀다가 족적을 남기기를 반복하면서 마음의 흐름을 따라 쓴 것 같은 ‘敬’ 자가 반듯하게 서서 당당하다. ‘齋’ 자에서는 그 필세(筆勢)를 더욱 변화무쌍하게 하면서도 빈틈없는 결구를 구성하여 정돈하였다. ‘경(敬)’이라는 가치를 소중하게 모시는 집의 위용을 보는 것 같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진주정씨 우복종가(晉州鄭氏 愚伏宗家) 소개



진주정씨 우복종가가 상주에 터를 잡은 것은 상주 판관을 지낸 정택(鄭澤)의 아들 정의생(鄭義生)이 상주의 호족 상산김씨 김득제(金得齊, 1315~?)의 사위가 되면서부터이다. 정의생은 처가 동네인 상신전촌에 살게 되었고, 정효옹(鄭孝翁), 정걸(鄭傑), 정극공(鄭克恭)까지 4대가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지금의 상주시 공성면 초오리와 인창리 사이다. 정극공의 아들 정번(鄭蕃, 1449~1521) 대에 이르면 역시 상주지역인 율리로 이거하게 된다. 1500년대를 전후한 시기로 보이는데, 지금의 상주시 청리면 소재이다. 율리에 살게 된 진주정씨는 대체로 한미하였다. 정번이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냈을 뿐 그의 아들 이하 3대는 모두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진주정씨는 정번의 현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현달하면서 상주지역의 명문으로 발돋움하였다. 우복 정경세의 현달로 인해 우복의 부친인 정여관(鄭汝寬, 1531~1590)은 좌찬성에, 조부인 정은성(鄭銀成, 1511~1560)은 이조참판에, 증조부인 정계함(鄭繼咸, ?~1526)은 좌승지에 추증되는 은전을 입게 되었다.

우복 정경세는 율리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지만 중년 이후로는 지금의 종가가 있는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우거하는 일이 많았다. 또 우산에 별장을 짓고 강학활동을 하다가 상주의 매호촌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경세는 만년에 각종 옥사에 연루되면서 삶이 안정적이지 못했는데, 결국 제자인 조희인(曺希仁)과 조우인(曺友仁)의 배려를 받으며 매호촌으로 이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1750년(영조 26)에 영조가 우복 정경세의 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독서하던 곳인 우산 기슭에 동서 5리 남북 10리의 사패지(賜牌地)를 내리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정경세의 후손들은 이를 가리켜 ‘칠리강산(七里江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경세의 5대손 정주원(鄭胄源, 1686~1756) 대에 이르러 청리면 율리를 떠나 외서면 우산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후손들이 지금까지 우산리와 그 주변에 세거하고 있다.

정주원의 손자 입재 정종로는 상주 진주정씨의 또 다른 불천위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은 정종로를 ‘경학과 문장이 융성하여 영남 제1의 인물’로 칭송하였다. 이후 정상진(鄭象晉), 정민수(鄭民秀), 정윤우(鄭允愚), 정동규(鄭東奎)를 거쳐 긍재(肯齋) 정의묵(鄭宜默, 1847~1906)에 이르러 또 한 번 큰 현달한 인물이 출현하게 된다. 긍재 정의묵은 1885년(고종 22)에 대과에 급제한 뒤에 여러 문한직을 역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유였던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1813~1872)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우복종가에 내려오는 서애학통을 착실하게 계승했다고 하겠다. 이렇듯 진주정씨 우복종가는 현재 15대 종손 정춘목(鄭椿穆)에 이르기까지 우복 정경세와 입재 정종로 두 명의 불천위를 배출한 영남의 대표적인 종가를 형성하였다.

우복종가는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의 우복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우복산은 속리산의 한 지맥이 동남으로 뻗어 화령을 지나 형성된 산이다. 그 아래로 우복천이 흐르는데, 이안천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복천은 화북면 동관리 형제봉과 청계산에서 발원하여 동북으로 우산의 어풍대(御風臺)를 지나 영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종가 앞쪽에는 천마산(天馬山 일명 시루봉)이 자리 잡고 있다.

입재 정종로는 우복 정경세의 6대손으로, 자는 사앙(士仰), 호는 입재(立齋)·무적옹(無適翁)이다. 1738년(영조 14)에 부친 정인모(鄭仁模)와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의 증손녀인 부계홍씨(缶溪洪氏) 사이에서 태어나 1816년(순조 16)에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조부 정주원으로부터 공부를 시작했으며 청소년기에는 중부 정의모(鄭義模)에게 나아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19세 되던 해에 조부 정주원과 부친 정인모, 중부 정의모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면서 뚜렷한 스승 없이 40세가 될 때까지 숙부 정지모(鄭智模)의 훈도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역대 사서는 물론이고 문장가의 서적을 두루 탐독하면서 학문과 문장에 대한 탄탄한 실력을 닦았다. 40세가 되던 1777년(정조 1)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등 이른바 ‘영남삼로(嶺南三老)’라 불리던 영남의 석학들에게 나아가 질의하고 토론하면서 학문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고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나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등과 도의지교를 맺으면서 이들을 평생 동안 학문적 동지로 삼았다. 1789년(정조 13) 6월에 광릉참봉, 8월에 의금부도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서지 않았고, 1796년(정조 20)에 사포서별제,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왔으나 나서지 않았다. 50대 이후 정종로는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대산 이상정과 함께 영남 남인의 학계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특히 이상정과는 ‘좌대산 우입재(左大山右立齋)’로 불렸다.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강학과 저술활동에 매진하였다. 그의 문집은 사후 19년이 지난 1835년(헌종 1)에 24책으로 발간되었고, 이듬해인 1836년(헌종 2)에 종가 인근에 세운 우산서원(愚山書院)에 우복 정경세와 함께 배향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남 유림의 공론에 따라 향불천위로 모셔져 오늘날까지 제향되고 있다.

한편 도존당은 입재 정종로가 1809년(순조 9) 무렵 지역 사림들과 함께 우복종택에서 약 200m 뒤에 건립한 서당이다. 그는 이곳을 강학장소로 삼아 매년 강회를 개최하였다. 정종로 사후 1834년(순조 34)에 우복 정경세를 봉향하고 서원으로 승격되었고, 2년 뒤인 1836년(헌종 2)에 입재 정종로를 배향하였다. 이후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2004년에 상주시에서 유교문화권사업비로 도존당만 복원하였다. 도존당은 조선 말기에 지어졌기 때문에 대산루(對山樓)나 우복종택과 같은 건축적 전통을 찾기란 어렵다. 기존에 남아 있던 초석의 배열에 따라 전면에 반 칸 툇마루를 둔 것은 상주지방 건축의 전통을 보여준다.

도존당은 고직사가 함께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평면은 가운데 대청 3칸에 양쪽으로 온돌방 2통칸씩을 배치시킨 중당협실형으로 앞면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구성은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소로수장에 전퇴 5량가 팔작집이다. 북쪽에는 고직사가 있는데 평면은 왼쪽으로부터 방 1칸, 정지 1칸, 그리고 방 1칸에다가 일자형으로 붙여 ‘ㄱ’ 자형이 되었다. 정지와 마루 위에는 각각 다락을 꾸몄다. 상부가구는 아담한 3량가에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린 맞배집이다. .

참고문헌
  • 류진희, 『立齋 鄭宗魯의 漢詩 硏究』, 경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 「진양정씨 우복종택」, 『경상북도 종가문화 연구』, 경상북도·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0
  • 우인수, 「입재 정종로의 사회적 위상과 현실대응」, 『朝鮮後期 嶺南 南人 硏究』, 경인문화사, 2015
  • 정우락, 『영남을 넘어, 상주 우복 정경세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3
  •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유교넷, 유교문화지도 (http://www.ugyo.net/tu/rin/ruins.jsp?sSiteCode=sjbb062&sMenuType=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