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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경당(克敬堂)

인동장씨 황상파 개옹공종중仁同張氏 凰顙派 㝏翁公宗中

30.5×58.5 / 전서(篆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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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극경당(克敬堂)
  • 글자체 전서(篆書)
  • 크기 30.5×58.5
  • 건물명 극경당(克敬堂)
  • 공간명 인동장씨 황상파 개옹공종중(仁同張氏 凰顙派 㝏翁公宗中)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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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경당(克敬堂)

극경당(克敬堂)



극경당(克敬堂)은 경상북도 성주 벽진면 봉계리에 세거하는 인동장씨(仁同張氏) 황상파(凰顙派) 개옹공종중(㝏翁公宗中)에서 소장하던 편액이다. ‘극경(克敬)’은 능히 공경한다는 뜻으로, 송나라 범준(范浚)의 「심잠(心箴)」에 “군자가 정성을 보존하여 능히 생각하고 능히 공경하면, 천군이 태연해져서 백체가 그 명령을 따를 것이다[君子存誠 克念克敬 天君泰然 百體從令]”라고 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천군’은 마음의 별칭으로 『순자』 「천론(天論)」의 “마음이 가운데 텅 빈 곳에 거하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다스리기 때문에 ‘천군’이라고 한다[心居中虛 以治五官 夫是之謂天君]”는 말에서 유래한다. 자신의 마음을 항상 공경해야 할 것을 지적한 명언이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전서체이다.

기교를 가하지 않은 곧고 단정하고 위엄 있는 소전으로 쓴 글씨다. 자기 자신 안에 정성을 간직하고 그로부터 생각하고 또 공경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느껴진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인동장씨 황상파 개옹공종중(仁同張氏 凰顙派 㝏翁公宗中) 소개



인동장씨(仁同張氏) 황상파(凰顙派) 개옹공종중(㝏翁公宗中)은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봉계리 집실[家谷]에 집성촌을 이루며 대대로 살아왔다. 벽진면은 남부로 이천(伊川)을 두고 대가면(大家面)과 인접하여 솟질·발간이·집실·종자골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집실은 고려 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홍언수(洪彦修)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서 이곳 집실로 이거하여 고을 사람들이 서울에서 ‘대가(大家)’ 집이 왔다 해서 ‘대가곡(大家谷)’이라고 불렀다. 이후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599년(선조 32) 개옹(㝏翁) 장봉한(張鳳翰, 1566~1644)이 이곳으로 이거하여 ‘가곡(家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황상파 개옹공종중은 고려 때 삼중대광 신호위상장군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다. 후손들이 옥산에 정착하여 본관을 옥산(玉山)으로 삼았다가 옥산이 인동으로 개칭됨에 따라 인동이 관향이 되었다. 이후 고려 말의 장안세(張安世)가 현달함으로써 명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함흥부윤과 덕녕부윤을 지냈는데, 함흥부윤으로 재직할 때 치수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홍수의 범람을 막았고 만세교(萬歲橋)라는 70여 칸 규모의 큰 다리를 세웠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였다. 이런 절의로 인하여 장안세는 별세 뒤 수백 년 후인 1834년(순조 34)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세상에서 이른바 두문동 72현의 한 분으로 추앙되었다. 장안세의 손자 장수(張脩)는 조선조의 벼슬에 나아가 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장수는 장보(張俌)와 장우(張俁)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보가 바로 개옹 장봉한의 5대조이다. 그는 풍저창승(豊儲倉丞)을 지냈으며, 1460년(세조 6) 5월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그의 손자인 장적손(張嫡孫)은 효행으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는 부모상을 당해 아우 장신손(張信孫)과 함께 소학산(巢鶴山)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고, 또 평생 동안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산소에서 삭망제를 지냈다. 장적손의 둘째 아들 장잠(張潛, 1497~1552)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구미 황상동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지어 은거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황상동 일대에 세거함에 따라 그는 인동장씨 황상파의 파조가 되었다. 장잠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인동현감으로 부임했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학문을 토론하였다. 장잠의 손자가 바로 개옹 장봉한이다.

장봉한은 자가 문거(文擧), 호가 개옹(㝏翁), 본관은 인동이며 부친은 장곤(張崑), 모친은 양성이씨(陽城李氏)로 이훈(李薰)의 딸이다. 1566년(명종 21) 10월 9일 인동에서 출생하였다. 8세 때 족형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에게 『소학』을 배웠다. 24세 때 성주의 회연초당(檜淵草堂)에서 강학을 하던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찾아가 『심경』과 『근사록』을 배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례(智禮)로 가서 의병장 송암(松庵) 김면(金沔)을 만나 왜적 토벌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때 성주목사 제말(諸沫)이 전사했는데, 이 틈에 성주의 승려 찬희(贊煕)와 찬숙(贊夙)이 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성주목사 행세를 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의병을 일으켜 찬희와 찬숙을 잡아 죽였다. 송암 김면과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가야산에 은거하였다. 이때 여헌 장현광이 난을 피해 찾아왔는데, 그와 함께 상례의 제도와 『예기』 등의 서적에 대해 깊이 탐구하였다. 그 뒤에도 인동부사로 있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삼가(三嘉)에 산성(山城)을 수축하는 일을 의논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때문에 의병으로 참여하였던 아우 장홍한(張鴻翰)과 사촌 장사진(張士珍)과 함께 ‘일문삼의사(一門三義士)’로 불렸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599년(선조 32) 성주의 대가곡에 은거하여 독서에 전념했는데, 특히 『주자서』를 탐독하였다. 1614년(광해 6)에는 스승인 한강 정구가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개찬할 때 다른 동문들과 함께 교정과 필사에 참여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장봉한은 71세의 나이로 북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식사를 물리친 채 아들인 지분헌(知分軒) 장이유(張以兪, 1598~1660)를 창의소에 보내 의병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결국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자 하늘을 향해 통곡하고 금원산으로 가서 동계(桐溪) 정온(鄭蘊)을 만났다. 1644년(인조 22) 79세로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주의 대소야산에 장사를 지냈다.

지분헌 장이유는 자가 자유(子裕), 호가 지분헌(知分軒), 본관은 인동이며 부친은 개옹 장봉한, 모친은 창원유씨(昌原俞氏)로 유수(俞遂)의 딸이다. 1598년(선조 31) 성주군 봉계리 가곡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친에게 『효경』과 『소학』을 배웠다. 1613년(광해 5) 인동으로 가서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 및 종형들과 함께 몇 달 동안 강독하였고, 이듬해에 아헌(啞軒) 송원기(宋遠器)를 따라 『심경』을 강론하였다. 1615년(광해 7) 부친을 모시고 여헌 장현광을 찾아뵌 뒤에 왕래하면서 공부를 했는데, 여헌의 제자들과 함께 절차탁마하였다. 1618년(광해 10) 부친이 두주동(斗珠洞)에 구지재(求志齋)를 지었다. 그는 그곳에서 독서하면서 어렵거나 의심나는 부분을 질문하여 깨우친 것이 많았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35년(인조 13) 퇴계 선생 변무에 관한 일로 소청(疏廳)에 갔다가 소를 지었는데, 두 개의 소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도창(李道昌)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는 노친 봉양으로 종군하지 못하고 후방에서 군량 조달을 담당하였다. 1637년(인조 15) 입암(立巖)으로 여헌 장현광을 배알하고 그곳에 머물러 강학하였다. 1654년(효종 5) 자그마한 재사를 짓고 ‘지분(知分)’이라 불렀다. 1660년(현종 1) 세상을 떠나니, 향년 6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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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星州마을誌』, 성주문화원, 1998
  • 이원조, 「성균진사지분헌선생장공행장(成均進士知分軒先生張公行狀)」, 『응와집(凝窩集)』
  • 정종로, 「개옹장공행장(㝏翁張公行狀)」, 『입재집(立齋集)』
  •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