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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각재(致慤齋)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義城金氏 龜尾 五友堂公派

48.3×76.2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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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치각재(致慤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8.3×76.2
  • 건물명 치각재(致慤齋)
  • 공간명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義城金氏 龜尾 五友堂公派)
  • 서예가 김굉(金㙆, 1739~1816)
  • 위치정보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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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각재(致慤齋)

치각재(致慤齋)



치각재(致愨齋)는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에 위치한 귀암정사(龜巖精舍) 서재(西齋)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76.2㎝, 세로 48.3㎝이다. ‘치각(致愨)’은 『예기』 「제의(祭義)」에 “선왕의 효도는 부모님의 안색을 눈에 잊지 못하며, 소리가 귀에 끊이지 않으며, 마음과 좋아하시던 것을 마음에 잊지 못하니, 사랑을 지극히 하면 보존되고 정성을 지극히 하면 나타나듯이 된다. 나타나고 보존하는 것을 마음에 잊지 않는데, 어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先王之孝也 色不忘乎目 聲不絶乎耳 心志嗜欲 不忘乎心 致愛則存 致慤則著 著存不忘乎心矣 夫安得不敬乎]”라고 한 데서 취한 말로, 이는 제사를 지낼 때 돌아가신 부모가 눈앞에 계신 것처럼 항상 잊지 않고 공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귀암정사는 오우당(五友堂) 김근(金近, 1579~1656)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6대손인 김굉(金㙆, 1739~1816)·김훈(金壎, 1738~1819)·김준(金埻, 1741~1792)의 주도로 1791년(정조 15) 재사(齋舍), 1793년(정조 17) 별묘(別廟) 그리고 1795년(정조 19) 가을에 모든 건물의 묘우(廟宇)를 짓고 귀암정사(龜巖精舍)라 하였다.

귀암정사 편액 뒤에 쓰인 “사당 편액과 재(齋)의 편액은 후손 김굉이 을묘년(1795)에 쓰다[廟額齋扁 後孫㙆筆 乙卯五月日]”라는 글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치각재 편액 글씨는 귀와(龜窩) 김굉이 쓴 해서체이다.

‘慤’ 자의 바늘 하나 꼽을 틈이 보이지 않는 치밀한 결구에서 성실함의 극치를 보는 것 같다. ‘致’ 자의 분위기는 장중하지만 민첩한 동작으로 성실함을 향하고 있다. ‘齋’ 자에 이르러 지극한 정성에 빠른 몸가짐까지 더했다. 각각의 글자는 꽉 채워져 있지만 자간(字間)을 갈수록 넓혀 시원한 개방감마저 갖추었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義城金氏 龜尾 五友堂公派) 소개



김근(金近, 1579~1656)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성지(性之), 호는 오우당(五友堂)이다. 아버지는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김안계(金安繼),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귀계(龜溪) 이중립(李中立)의 딸이다. 김근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채 열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경사(經史)를 섭렵하였다. 책을 읽을 때는 한 번에 여러 행을 동시에 읽고 한 번 읽은 것은 곧 기억할 수 있었다고 한다. 평소 항상 근엄하고 부지런하였으며 생업을 하지 않고 독서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또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이나 부귀하고 권세 있는 집 근처에는 스스로 피하여 가까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독서를 할 때는 좌우에 책을 쌓아 놓고 가운데 앉아서 책 속의 깊은 뜻을 탐구하였다고 한다. 1623년(인조 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파방되었고 1642년(인조 20) 다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리로 임용되지 못하였다. 일찍이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 생담에 손수 송(松)·죽(竹)·매(梅)·국(菊)·연(蓮) 등 군자를 상징하는 다섯 가지 식물을 심어 놓고 오우당(五友堂)이라 부르고는 소요자적 하였다. 김근은 나이를 먹으면서 학문을 좋아하는 성정이 더욱 돈독하여져서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으며,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이나 의도적인 목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참된 선비정신을 몸소 실천하였다. 김근의 사람됨에 대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유림노성(儒林老成 유학자의 도를 이룩한 사람)’이라 칭찬하였고, 사서(沙西) 전식(全湜, 1563~1642)은 “성품이 고요하고 편안하며 스스로를 잘 지켜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은 “함부로 교유하지 않으며 언행을 조심하였다”라고 하였다.

귀와(龜窩) 김굉(金㙆, 1739~1816)이 「귀암정사기사(龜巖精舍記事)」에서 귀암정사 건립에 대한 전말을 기록하고 있어 옮겨보기로 한다.

신해년 3월에 터를 닦아 먼저 재사(齋舍)를 짓고, 2년 뒤인 계축년에 별묘(別廟)를 경영하였는데, 참봉 이우(李㙖)가 상량문을 지었다. 을묘년 가을에 공사를 끝마쳤다. 앞쪽에는 재사와 주방을, 뒤에는 묘우를 두었는데 공역에 난이(難易)가 있었다. 사당은 3칸이고 재사와 협실(夾室)이 각각 2칸이고, 강당은 4칸, 주사는 12칸으로 모두 20여 칸이다. 비록 제도가 투박하고 고루하며 규모가 좁으나 후손들의 힘을 다하였다. 사당은 추원(追遠), 동재(東齋)는 치각(致愨), 서재(西齋)는 양정(養正), 강당은 강수(講修)라 하였으며, 합칭하여 귀암정사(龜巖精舍)라 편액하였다. 10월 17일에 오시(午時)에 봉안하고 다음 날 새벽에 제사를 거행하였다. 제향의 의례는 모두 서산(西山) 영당(影堂)의 의절을 따랐는데, 선사(先師)이신 이선생(李先生)께서 헤아려서 절충하신 것이다. (중략)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을 주간(主幹)한 사람은 후손 훈(壎)·준(埻) 형제이다.

한편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 1722~?)가 후손을 대신해서 지은 귀암정사 봉안문(奉安文)의 일부분을 옮겨보기로 한다.

쇠처럼 강인하고 옥처럼 곧은 품성을 지녔고, 청결과 청렴으로 스스로를 규율하였네. 문을 닫아걸고 고요함을 지켜 효로써 봉양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셨다. 자질이 심원하고 쌓은 덕이 중후하며, 행실이 이루어지고 덕이 밝으셨네. 재주는 세상을 어루만질 만하고 문장은 나라를 빛내기에 족하였다. 그러나 시운이 막히고 어긋나서, 높은 뜻을 품속에 지니고서 산속에 은둔하셨네. 생담(笙潭)은 맑고도 넓으며, 귀봉(龜峯)은 높고도 높도다. 꽃은 노랗고 꽃술은 희며, 그림자는 차고 향기는 맑았다. 호젓하게 초가집에서 선왕의 덕을 노래하고 읊었으니, 은거하여 본성을 기르는 즐거움이 즐겁고도 끝이 없었도다. 훈(塤)과 지(篪)가 어우러져 맑은 소리를 내듯이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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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김굉(金㙆), 『귀와문집(龜窩文集)』
  • 김근(金近), 『오우당문집(五友堂文集)』
  • 한국국학진흥원, 『의성김씨 귀미파문중』,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61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