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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당(講修堂)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義城金氏 龜尾 五友堂公派

57.3×125.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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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강수당(講修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7.3×125.0
  • 건물명 강수당(講修堂)
  • 공간명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義城金氏 龜尾 五友堂公派)
  • 서예가 김굉(金㙆, 1739~1816)
  • 위치정보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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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당(講修堂)

강수당(講修堂)



강수당(講修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에 위치한 귀암정사(龜巖精舍) 강당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25㎝, 세로 57.3㎝이다. ‘강수(講修)’는 『예기보주(禮記補註)』 「예운(禮運)」에 “신의를 강하고 화목을 닦는다[講信修睦]”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성인(聖人)이 천하로써 한 집안을 만들고 중국(中國)으로써 한 사람처럼 만들 수 있는 것은 뜻으로 짐작해서가 아니요, 반드시 그 정(情)을 알아서 그 의(義)를 열어주며 그 이로움을 밝혀주며 그 근심을 통달해서이니, 그런 뒤에야 능히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을 사람의 정(情)이라 이르는가?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이니, 이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아도 능한 것이다. 무엇을 사람의 의(義)라고 이르는가? 아버지는 사랑하고 아들은 효도하며 형은 선량하고 아우는 공경하며 남편은 의롭고 부인은 그 말을 따르며 어른은 은혜롭고 어린이는 순종하며 인군(人君)은 인(仁)하고 신하는 충성하는 것이니, 이 열 가지를 사람의 의(義)라 이른다. 신의(信義)를 강(講)하고 화목을 닦는 것을 사람의 이로움이라 이르고, 쟁탈하여 서로 죽임을 사람의 환란(患亂)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성인이 사람의 일곱 가지 정(情)을 다스리고 열 가지 의(義)를 닦으며 신의를 강하고 화목을 닦으며 자양(慈讓)을 숭상하고 쟁탈을 버리는 것은 예(禮)를 놓아두고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故聖人耐以天下爲一家 以中國爲一人者 非意之也 必知其情 辟於其義 明於其利 達於其患 然後能爲之 何謂人情 喜怒哀懼愛惡欲 七者弗學而能 何謂人義 父慈子孝兄良弟弟夫義婦聽長惠幼順君仁臣忠 十者謂之人義 講信修睦謂之人利 爭奪相殺謂之人患 故聖人之所以治人七情 修十義 講信修睦 尙慈讓 去爭奪 舍禮何以治之]”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귀암정사는 오우당(五友堂) 김근(金近, 1579~1656)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6대손인 김굉(金㙆, 1739~1816)·김훈(金壎, 1738~1819)·김준(金埻, 1741~1792)의 주도로 1791년(정조 15) 재사(齋舍), 1793년(정조 17) 별묘(別廟) 그리고 1795년(정조 19) 가을에 모든 건물의 묘우(廟宇)를 짓고 귀암정사(龜巖精舍)라 하였다.

귀암정사 편액 뒤에 쓰인 “사당 편액과 재(齋)의 편액은 후손 김굉이 을묘년(1795)에 쓰다[廟額齋扁 後孫㙆筆 乙卯五月日]”라는 글귀로 보아 강수당 편액도 귀와(龜窩) 김굉이 쓴 해서체로 추정된다.

곧고 강한 획으로 가득 채웠으면서도 보는 사람이 답답하게 느끼지 않는 것에서 학문을 익혀서 실천할 때에는 융통성 있게 하여야 함을 말해주는 것 같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義城金氏 龜尾 五友堂公派) 소개



김근(金近, 1579~1656)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성지(性之), 호는 오우당(五友堂)이다. 아버지는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김안계(金安繼),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귀계(龜溪) 이중립(李中立)의 딸이다. 김근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채 열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경사(經史)를 섭렵하였다. 책을 읽을 때는 한 번에 여러 행을 동시에 읽고 한 번 읽은 것은 곧 기억할 수 있었다고 한다. 평소 항상 근엄하고 부지런하였으며 생업을 하지 않고 독서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또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이나 부귀하고 권세 있는 집 근처에는 스스로 피하여 가까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독서를 할 때는 좌우에 책을 쌓아 놓고 가운데 앉아서 책 속의 깊은 뜻을 탐구하였다고 한다. 1623년(인조 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파방되었고 1642년(인조 20) 다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리로 임용되지 못하였다. 일찍이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 생담에 손수 송(松)·죽(竹)·매(梅)·국(菊)·연(蓮) 등 군자를 상징하는 다섯 가지 식물을 심어 놓고 오우당(五友堂)이라 부르고는 소요자적 하였다. 김근은 나이를 먹으면서 학문을 좋아하는 성정이 더욱 돈독하여져서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으며,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이나 의도적인 목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참된 선비정신을 몸소 실천하였다. 김근의 사람됨에 대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유림노성(儒林老成 유학자의 도를 이룩한 사람)’이라 칭찬하였고, 사서(沙西) 전식(全湜, 1563~1642)은 “성품이 고요하고 편안하며 스스로를 잘 지켜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은 “함부로 교유하지 않으며 언행을 조심하였다”라고 하였다.

귀와(龜窩) 김굉(金㙆, 1739~1816)이 「귀암정사기사(龜巖精舍記事)」에서 귀암정사 건립에 대한 전말을 기록하고 있어 옮겨보기로 한다.

신해년 3월에 터를 닦아 먼저 재사(齋舍)를 짓고, 2년 뒤인 계축년에 별묘(別廟)를 경영하였는데, 참봉 이우(李㙖)가 상량문을 지었다. 을묘년 가을에 공사를 끝마쳤다. 앞쪽에는 재사와 주방을, 뒤에는 묘우를 두었는데 공역에 난이(難易)가 있었다. 사당은 3칸이고 재사와 협실(夾室)이 각각 2칸이고, 강당은 4칸, 주사는 12칸으로 모두 20여 칸이다. 비록 제도가 투박하고 고루하며 규모가 좁으나 후손들의 힘을 다하였다. 사당은 추원(追遠), 동재(東齋)는 치각(致愨), 서재(西齋)는 양정(養正), 강당은 강수(講修)라 하였으며, 합칭하여 귀암정사(龜巖精舍)라 편액하였다. 10월 17일에 오시(午時)에 봉안하고 다음 날 새벽에 제사를 거행하였다. 제향의 의례는 모두 서산(西山) 영당(影堂)의 의절을 따랐는데, 선사(先師)이신 이선생(李先生)께서 헤아려서 절충하신 것이다. (중략)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을 주간(主幹)한 사람은 후손 훈(壎)·준(埻) 형제이다.

한편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 1722~?)가 후손을 대신해서 지은 귀암정사 봉안문(奉安文)의 일부분을 옮겨보기로 한다.

쇠처럼 강인하고 옥처럼 곧은 품성을 지녔고, 청결과 청렴으로 스스로를 규율하였네. 문을 닫아걸고 고요함을 지켜 효로써 봉양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셨다. 자질이 심원하고 쌓은 덕이 중후하며, 행실이 이루어지고 덕이 밝으셨네. 재주는 세상을 어루만질 만하고 문장은 나라를 빛내기에 족하였다. 그러나 시운이 막히고 어긋나서, 높은 뜻을 품속에 지니고서 산속에 은둔하셨네. 생담(笙潭)은 맑고도 넓으며, 귀봉(龜峯)은 높고도 높도다. 꽃은 노랗고 꽃술은 희며, 그림자는 차고 향기는 맑았다. 호젓하게 초가집에서 선왕의 덕을 노래하고 읊었으니, 은거하여 본성을 기르는 즐거움이 즐겁고도 끝이 없었도다. 훈(塤)과 지(篪)가 어우러져 맑은 소리를 내듯이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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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김굉(金㙆), 『귀와문집(龜窩文集)』
  • 김근(金近), 『오우당문집(五友堂文集)』
  • 한국국학진흥원, 『의성김씨 귀미파문중』,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61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