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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교당(明敎堂)

우계이씨종택羽溪李氏宗宅

51.0×133.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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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명교당(明敎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1.0×133.0
  • 건물명 명교당(明敎堂)
  • 공간명 우계이씨종택(羽溪李氏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4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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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교당(明敎堂)

명교당(明敎堂)



명교당(明敎堂)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사제(沙堤)에 위치한 도계서원(道溪書院) 강당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우계이씨 종택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33㎝, 세로 51㎝이다. ‘명교(明敎)’는 오교(五敎) 즉 오륜(五倫)을 밝힌다는 뜻이다.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한다. 도계서원은 1610년(광해 2)에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 1435~1528)의 절의와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 그 뒤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1426~1457), 충장공(忠壯公) 이보흠(李甫欽, ?~1457), 취사(炊沙) 이여빈(李汝馪, 1556~1631)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추향(追享)하였다. 그리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공극루(拱極樓)만 남긴 채 훼철되었다가 2005년 우계이씨 문중의 노력으로 복설(復設)되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반드시 오륜을 몸에 익혀 실천해야 함을 웅변하는 듯 강직한 획으로 크게 쓴 글씨가 압도적이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우계이씨종택(羽溪李氏宗宅) 소개



이유(李瑜, 1426~1457)는 세종의 아들로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錦城大君)으로 봉해졌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할 때 수양대군과 함께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을 반대하였고, 1455년(단종 3) 삭령으로 유배되었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는데 여기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등과 함께 폐위된 단종을 위한 거사를 모의하였다. 그리하여 고을 군사와 향리 등을 모으고 사족들에게 격문을 돌려 뜻을 같이하는 인사를 찾았다. 그러나 거사 이전에 한 관노의 고발로 계획이 탄로가 나 결국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보흠(李甫欽, ?~1457)은 1429년(세종 11)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학사가 되고, 세종실록 편찬에도 관여하였다. 순흥부사로 있던 1457년(세조 3), 유배 와 있던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평안도 박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정조 때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도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수형(李秀亨, 1435~1528)은 본관이 우계(羽溪), 자가 영보(英甫), 호가 도촌(桃村)이다. 이수형은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20세에 이미 벼슬길에 나아가 5품직을 받았다. 21세 되던 해 평시서령(平市署令)이라는 직위에 있을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생육신의 일원들인 관란(觀瀾) 원호(元昊), 어계(漁溪) 조려(趙旅)와 함께 단종을 향한 충절의 징표로 원주 치악산에 있는 바위에 각자의 이름을 새기고는 장인의 고향인 순흥 도지리(道知里 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로 이주하여 은거하였다. 이수형은 세조가 대군의 신분으로 있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였다. 이런 까닭에 왕위 찬탈 후에도 세조는 인근의 관원을 시켜 음식을 정기적으로 보내 우대하곤 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21세에 은거하여 94세로 죽을 때까지 70여 년 동안 집이 있는 한양 땅을 한 번도 밟지 않았다. 단종에 대한 이수형의 충절은 자신이 지은 가옥 구조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은거지인 도지리 지세를 고려할 때 동남향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마땅함에도 이수형은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집의 동편에 한가하게 지낼 장소를 마련하였는데, 1칸짜리 방이 남쪽에 위치하고 그 2배 크기의 마루는 북쪽에 자리 잡은 구조였다. 또 방의 동남쪽 벽은 2개의 엇창살만을 만들어 채광만 가능하고 사람 통행은 불가능하도록 하였고, 북쪽 벽은 종이로 앞에 놓인 마루를 가리게 하고 중간에 문을 만들어 사람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마루 또한 동서는 모두 벽으로 둘러막아 방에서는 오직 북쪽의 먼 산만을 볼 수 있게 했다. 이는 모두 장릉(莊陵 단종의 릉)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고자 하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위패가 봉향된 사당의 명칭도 ‘견일사(見一祠)’라 명명하였다.

이여빈(李汝馪, 1556~1631)의 자는 덕훈(德薰), 호는 취사(炊砂)이다. 이수형의 현손이고, 참봉 이효신(李孝信)의 아들이다. 감곡(鑑谷)의 우계이씨 입향조인 그는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처음엔 한우(韓佑)에게 배우다가 소고 박승임(朴承任)의 문하에 들어가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였다.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선조 28)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벽사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노모의 병간호로 사직하였다. 1610년(광해 2) 성균관전적에 승진 임명되었으나 사양했으며,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李爾瞻)이 권세를 잡으면서 세상이 자못 어지러웠다. 이에 이이첨을 목 벨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또 정인홍 등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올린 취사는 7일 동안 궐문(闕門) 밖에 엎드려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감곡에 은거하여 후진 교육에 힘썼으며, 또 인수정(因樹亭)을 지어 시서(詩書)를 즐기며 삶을 마쳤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활동과 처절했던 난리의 상황을 기록한 『용사록(龍蛇錄)』을 남겼고, 영주지역에 대한 관심을 두어 『영주지(榮州誌)』를 간행하려고 서문까지 써놓았으나 끝내 간행하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1715년(숙종 41)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도계서원은 사당과 서원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 영역은 그리 넓지 않고, 건물은 조금 높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구조이다. 측면의 경우, 칸수는 3칸이지만 칸의 너비는 반 칸 정도로 아주 좁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1칸 반의 규모인 것이다. 서원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 4칸 중 중앙의 2칸은 마루이고, 좌·우 각 1칸은 방이다. 건물 앞으로 나서 있는 기둥이나 건물 속에 포함되어 있는 기둥이나 기둥은 다 원형이고, 상당한 굵기의 싸리나무로 만들었다. 기둥들은 원형으로 잘 다듬어진 주초 위에 올라서 있다.

참고문헌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