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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교재(樂敎齋)

우계이씨 취사문중羽溪李氏 炊沙門中

42.5×77.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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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낙교재(樂敎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2.5×77.5
  • 건물명 낙교재(樂敎齋)
  • 공간명 우계이씨 취사문중(羽溪李氏 炊沙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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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교재(樂敎齋)

낙교재(樂敎齋)



낙교재(樂敎齋)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에 건립한 감계서당(鑑溪書堂) 동재(東齋)의 편액으로 추정된다. 이 편액은 우계이씨 취사문중에서 기탁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77.5㎝, 세로 42.5㎝이다. ‘낙교(樂敎)’는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천하에 왕 노릇 함은 여기에 들어 있지 않다. 부모가 모두 생존해 계시고 형제가 무사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우러러보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 인간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君子有三樂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라고 하였는데, 마지막 세 번째 즐거움에서 낙(樂)과 교(敎)를 취하여 명명한 것이다. 감계서당은 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건립된 것이기 때문에 교육과 관련 있는 것으로써 동재(東齋)의 이름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여빈(李汝馪, 1556~1631)의 문집인 『취사집 연보(炊沙集年譜)』에 “감계서당에 취사(炊沙) 이여빈의 묘우를 건립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역 사림(士林)이나 후손들이 이여빈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서당을 건립하여 후학을 양성한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봉화지역에서 학문이 뛰어난 네 분인 권두인(權斗寅), 권두경(權斗經), 이동완(李棟完), 이완(李琓)을 일컬어 천성사로(川城四老)라고 하는데, 이 중 한 분인 귀애(龜崖) 이완(李琓, 1650~1732)이 이곳 감계서당에서 순흥부사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는 기록도 있다. 감곡(鑑谷)은 예부터 ‘감실(鑑室)’이라고도 일컬어졌는데 옛날에 이 마을 앞에는 ‘감호(鑑湖)’라고 불리는 못(池)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풍년 농사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못에 물이 가득 차기를 빌어 그때마다 못에 물이 가득 차서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며, 그로 인해 훗날 마을을 감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감실은 순흥도호부의 2부석의 7동네 중 한 곳으로 마구령에서 근원한 임곡천(林谷川)과 미내재(美乃嶺), 자개봉(紫蓋峰)에서 근원한 사문천(沙文川)이 부석에서 합쳐져 동남으로 흘러 낙화암천(落花岩川)을 이루고 있으니 이 물이 감실을 감고 흐른다. 태백과 소백 양산이 길게 뻗어 봉황이 되어 만나고 낙하암천은 그 아래로 남쪽 10여 리를 쉼 없이 흘러 감곡에 이르러 산과 물을 평탄하고 온유하게 돌아 흐르게 하고 있으니 이곳은 선비들이 터전을 자리 잡을 만한 곳이다. 또한 낙화암천의 맑은 물과 우곡, 도탄, 감실, 석남으로 이어진 10여 리의 넓은 들판은 감실의 풍요를 상징한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세상에 나서 사람이라는 싹을 훌륭한 인물로 길러내는 즐거움으로 마무리하는 흐뭇함이 가득한 ‘樂’ 자다. 그러나 ‘敎’ 자에서는 회초리를 든 훈장님의 완고함이 보인다. 공부를 할 때에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고 말하는 듯한 ‘齋’ 자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우계이씨 취사문중(羽溪李氏 炊沙門中) 소개



이여빈(李汝馪, 1556~1631)은 본관이 우계(羽溪), 자가 덕훈(德薰), 호가 도촌(道村)·감곡(鑑谷)·만취(晩翠)·취사(炊沙)이다.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 1435~1528)의 후손이다. 감곡(鑑谷)의 우계이씨 입향조인 그는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처음엔 한우(韓佑)에게 배우다가 소고 박승임(朴承任)의 문하에 들어가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였다.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선조 28)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벽사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노모의 병간호로 사직하였다. 1610년(광해 2) 성균관전적에 승진 임명되었으나 사양했으며,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李爾瞻)이 권세를 잡으면서 세상이 자못 어지러웠다. 이에 이이첨을 목 벨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또 정인홍 등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올린 취사는 7일 동안 궐문(闕門) 밖에 엎드려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감곡에 은거하여 후진 교육에 힘썼으며, 또 인수정(因樹亭)을 지어 시서(詩書)를 즐기며 삶을 마쳤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활동과 처절했던 난리의 상황을 기록한 『용사록(龍蛇錄)』을 남겼고, 영주지역에 대한 관심을 두어 『영주지(榮州誌)』를 간행하려고 서문까지 써놓았으나 끝내 간행하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1715년(숙종 41)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취사문집(炊沙文集)』 6권이 전한다.

이여빈의 후손들은 이곳 감곡에서 대를 이어 살았는데, 이인좌의 난 때 순흥 의병장을 역임한 무릉(武陵) 이징도(李徵道)를 비롯하여 백은당(白隱堂) 이진만(李鎭萬, 1675~1752), 진보현감을 지낸 이진주(李鎭周), 감호(鑑湖) 이경제(李慶濟)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현재 이곳 감곡에는 인수정, 백은당, 우계이씨 별묘(別廟), 우계이씨 재사(齋舍), 취사종택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여빈이 건립한 인수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방형(方形) 정자로 좌측은 마루칸이고 우측은 온돌방 1칸 반, 툇마루를 내밀고 헌함(軒檻)을 돌렸다. 당호인 인수(因樹)란 ‘나무에 기대어 집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자신의 몸을 낮추고 숨어 산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건물의 지붕은 홑처마 팔각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우계이씨 별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구성되어 있고, 재사는 취사 이여빈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하였는데 종택과 별묘 사이 넓은 터에 동남을 향한 ‘ㅡ’ 자형 몸체와 ‘ㄴ’ 자형 아래채가 전체적으로 ‘ㄷ’ 자형을 이루고 있다. 취사종택은 감실 북쪽 산자락 끝에 동남쪽을 향한 안채와 사랑채, 동북쪽을 향한 옆채가 전체적으로 튼 ‘ㄷ’ 자형으로 놓여 있다. 취사의 묘역은 동으로 약 200m 거리에 있는 야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

참고문헌
  • 이여빈, 『취사집(炊沙集)』, 한국고전번역원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