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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明倫堂)

예안향교禮安鄕校

58.5×165.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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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명륜당(明倫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8.5×165.0
  • 건물명 명륜당(明倫堂)
  • 공간명 예안향교(禮安鄕校)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2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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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明倫堂)

명륜당(明倫堂)



명륜당(明倫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에 위치한 예안향교 강당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예안향교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65㎝, 세로 58.5㎝이다. ‘명륜(明倫)’은 유교의 덕목인 오륜(五倫)을 밝힌다는 뜻으로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명륜당에는 예안향교 학령(學令)과 백록동규(白鹿洞規)를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다. 그리고 예안현감 심영(沈鐛)이 예안향교에 속한 전답과 노비 등을 문서로 관리하는 등의 새로운 규칙을 제정하고 교생들이 지켜야 할 수칙에 대해 정립한 완문(完文)도 있다. 또한 관찰사가 예안현에 보낸 관문은 중종 임금이 『소학』 읽기를 권장해야 한다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1543)의 글을 수용하여 예조에 내린 전지(傳旨)에 의거하여 예안향교에 『소학』을 읽도록 한 것이므로 그 의미가 특별하다고 할 것이다.

내가 어찌 교화를 베풀고 풍속을 살피리오

얼굴 들고 영남 사람 대하기가 부끄럽구나

부디 소학으로 떳떳한 가르침을 부지하여

여러 학생들이 날로 새롭기를 권면하노라

김안국은 인재양성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예의를 밝히고 염치를 기르는 것을 입교(立敎)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렇듯 김안국이 유생들을 부지런히 이끌어주고 경계함이 이 한 절구 시에 밝게 드러나서 당시의 군자들이 매우 감탄하여 이를 목판에 새겨 걸었다. 또 조정에서는 다른 고을에도 이를 알려 많은 인재들에게 소학을 권장하게 하였다. 한편 1572년(선조 5)에는 전곡(錢穀)을 모아 춘추석전(春秋釋奠) 때 여러 집사들이 상재생(上齋生)(금응협, 조목)과 하재생(下齋生)(김기, 김해)을 접대하여 시례(詩禮)와 문행을 날마다 연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예안을 문헌의 고을이라 일컫게 되었고 또 영남의 사론이 모두 이 향교에서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화려한 기교를 보이기보다는 기본에 충실하면서 묵직하게 쓴 글씨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예안향교(禮安鄕校) 소개



예안향교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204-1번지에 위치한 조선 전기 관학 교육기관으로, 오늘날의 국립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예안향교는 1411년(태종 11)에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보호수로 지정된 양호루 앞 은행나무가 말해주듯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향교란 제사와 교육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예안지역에서 이러한 기능을 가진 공간은 예안향교가 처음이고, 이후 1570년(선조 3) 우탁을 제향하는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설되기 전까지 농암 이현보, 송재 이우, 퇴계 이황을 비롯한 예안의 선비들이 이곳을 출입하면서 학업을 익힌 곳으로 예안지역 교육의 토대를 형성한 메카이기도 하였다.

예안향교는 1490년(성종 21)에 보수를 한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중수와 보수, 수리 등의 과정이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1569년(선조 2)에 현감 손영제가 중수하였고, 1625년(인조 3)에 수리가 되었으며, 1745년(영조 21)에는 현감 김광수(金光遂, 1696~?)가 중수하였다. 1841년(헌종 7)에 다시 수리 과정을 거쳐 1900년(고종 37)과 1954년에도 중수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8월 31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경상북도 향교재단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이렇듯 예안향교는 오랜 세월 동안 예안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채 관민들의 열과 성에 의해 현재까지 유지되어 왔다. 현재 예얀향교의 제향은 춘추절인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받들고 있다.

명륜당(明倫堂)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평면 구성은 좌측 전면 1칸을 통칸 온돌방으로 하고 나머지 3칸은 우물마루를 시설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봉화·풍기·영주향교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익공(無翼工)의 오량(五樑) 구조로, 단면이 원형에 가까운 직재(直材)로 대량(大樑)을 걸고 위에 초각하지 않은 보아지를 끼운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았다. 대부분의 향교는 명륜당과 대성전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데, 예안향교는 명륜당이 왼쪽에 비켜서 있는 점이 특이하다.

명륜당 앞에는 100여 년 전부터 무궁화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 무궁화는 수령이 오래되고 꽃잎이 매우 독특하여 2004년에 보호수로 지정될 정도로 매우 귀중한 품종이다. 무궁화는 현재 세계적으로 200여 종의 품종이 있다. 일반적인 무궁화는 꽃잎이 넓고 큰 데 비해 예안향교의 꽃잎은 무궁화 종류 중에서 가장 작고 탐스럽기 그지없다. 꽃잎과 꽃잎 사이가 동떨어져 있어 마치 산삼 잎과 같은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를 재래종 무궁화로 부르고 있다. 예안향교 무궁화가 널리 알려진 계기에 대해서는 안동권발전연구소 이진구로부터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992년 임하댐 건설로 인해 수몰 위기에 있는 길안의 용계은행나무를 상식하는 과정에서 산림청과 문화재청의 전문요원이 와서 실태조사를 하였다. 이때 임학과 교수 두 분이 함께 와서 실태를 조사하고 확인하고 나서 안동에 가치가 있는 또 다른 특이한 나무의 여부를 물었다. 이에 안동시 관계자가 예안향교 명륜당 앞 무궁화의 존재를 알려준 것에서 비롯된다. 임학과 교수들은 이 무궁화가 재래종 가운데에서 매우 독특하고 최고령인 것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하여 산림청 내의 임목육종연구소에서 원종의 가지를 잘라가서 삽수(揷樹)해서 육성해왔다. 일반 무궁화의 수명은 4, 50년 정도인데, 이 무궁화는 100년이라는 세월을 지켜왔다. 이 무궁화는 두 교수의 이름을 따서 학계에 등록되는 과정에서 꽃의 크기가 작다는 이유로 일명 애기무궁화로 등록되어 있다. 또 일반적인 무궁화는 아침 해가 뜰 때 꽃이 피고 해가 질 때 꽃이 진다. 그런데 이 재래종 무궁화는 36시간이나 피어 있다는 점이 매우 이채롭다.

이진구는 100년이 넘은 이 무궁화가 예안향교에 심긴 것은 국권상실이라는 아픔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1800년 말에 애국가를 제정하고 국화(國花)를 제정할 당시에 예안향교 유림의 선각자 중 한 사람이 서울을 드나들면서 나라꽃이 무궁화로 정해지자,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의도에서 향교의 중심부에 무궁화를 심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안 유림에서도 이곳을 성스러운 장소를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1910년에 나라를 잃게 되자, 국권을 상실한 예안향교 유생들은 명륜당을 오르내리며 무궁화의 개화를 바라보며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한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3·1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국권수호를 위해 한 맺힌 목소리를 외쳤던 것이다.

한편 1992년에 성균관대학교 심경구 교수가 20여 가지를 잘라 가서 삽수하고 연구한 결과 1999년에 정식으로 안동무궁화로 등록하였다. 이때 예안향교무궁화로 등록하지 않고 안동무궁화로 등록한 데는 안동시군이 통합된 상태라서 지역주민과 시 관계자가 안동무궁화로 등록하는 데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경구 교수는 이 무궁화가 마디 사이가 짧고 수고(樹高)도 2m밖에 안 되는 왜성 나무라는 점에 착안하여 나무의 크기를 더 작게 하면서 꽃은 더 많이 피우도록 품종을 개량하였다. 개량된 품종은 미국에 수출되어 아마존이라는 사이트에서 일정한 가격으로 팔리기도 한다. 팔릴 때마다 로얄티를 지급받고 있는데, 나무가 외국에서 로얄티를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심경구 교수는 또 이 무궁화와 7m나 되는 남원무궁화를 접목해서 영호남화합무궁화라는 새로운 품종을 개량하기도 하였다.

한편 10여 년 전에 희귀종이라는 소식을 접한 동아일보에서 무궁화의 위치는 그대로 두고 지속적으로 무궁화를 관리해주겠다고 하면서 무궁화의 기탁을 제안하였으나 예안향교에서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후 무궁화는 수명이 다된 탓인지는 몰라도 2002년경부터 한쪽 가지가 말라가는 증상을 보였고, 매년 말라가는 가지의 숫자는 증가하였다. 그러다가 2009년 명륜당 지붕의 기와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명륜당 앞 축대를 쌓는 과정에서 인부들이 고귀한 무궁화라는 것을 모른 채 기와를 마구잡이로 밑으로 내리는 바람에 무궁화의 가지가 꺾이고 몸체는 기와 더미에 깔리고 말았다. 뒤늦게 향교 관계자가 이 사실을 알고서 기와 더미를 치우고 기울어진 무궁화를 똑바로 세우려다가 무궁화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과실로 인해 무궁화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나, 많은 사람들은 그냥 두었어도 곧 수명을 다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때 심경구 교수가 예안향교 무궁화의 참변 소식을 접하고서 이전에 삽수해서 길러오던 무궁화 두 그루를 향교에 제공해주었다. 그리하여 2011년 4월에 현 위치에 식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식수된 이 무궁화는 원종이 아닌 개량종의 일종이다.

참고문헌
  • 황만기, 『선성지와 서부리』, 민속원, 2018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안동문화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