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실(進修室)
진수실(進修室)은 낭산(朗山) 이후(李垕, 1870∼1934)가 학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1930년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에 세운 북산정사(北山精舍) 실(室)의 편액이다. ‘진덕(進德)’은 『주역(周易)』 「건괘(乾卦)_문언(文言)」에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덕을 진전시키고 업을 닦나니, 충신이 덕을 진전시키는 것이다[君子 進德修業 忠信 所以進德也]”라고 한 데서 취한 말로, 진실함과 신뢰를 바탕으로 덕행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글씨는 담당(澹堂) 송우용(宋友用, 1864∼1968)의 해서체이다.
영천 전주이씨 낭산주손가(永川 全州李氏 朗山胄孫家) 소개
진수실(進修室) 편액이 있는 북산정사(北山精舍)가 자리한 애련리는 팔공산 동쪽 사면의 구릉성 평지에 위치한 마을이다. ‘애련’이라는 지명은 군자는 연꽃을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 애련리는 본래 영천군 북습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삼괴동·죽계동·봉계동을 병합하여 애련동이라 하여 청통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3일에는 동(洞)을 리(里)로 바꾸게 되어 애련리가 되었고, 1995년 1월 1일 영천시·영천군 통합으로 새로운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로 개칭되었다. 북산정사는 낭산(朗山) 이후(李垕, 1870~1934)가 학도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1930년에 세운 정사(精舍)이다. 정사의 사전적 의미는 강학(講學)과 수양(修養)을 위해 지은 집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 정사 건축의 개념이 형성된 시기는 14세기경 조선의 건국과 함께 성리학이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성리학의 전성기인 16~17세기경 주자(朱子)의 무이정사(武夷精舍) 개념이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 정사의 의미는 은거 생활을 위한 공간, 수학을 위한 공간, 강학의 장소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가 1930년 여름 16일에 지은 「북산정사기(北山精舍記)」에 따르면 “산이 군치(郡治)의 서쪽에 있는데 북이라 한 것은 마을 이름을 따른 것이다. 혹 말하기를 옛 이지현(梨智縣)이 남쪽에 있기 때문에 현(縣)을 근거로 말한 것이라고도 한다. 대개 팔공산 한 맥은 동북으로 20리를 달리다가 솟아나 봉서산을 이루고 산의 좌우는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서로 엉키고 돌다가 한 동천(洞天)을 이루니 바로 천곡(泉谷)이다. 두 줄기 차가운 샘이 청통면 남북에 있는데 가뭄이나 장마에도 증감이 없어 천곡(泉谷)이란 이름이 이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지난 1896년에 내가 이 골짜기에 집을 마련하니 장차 밭 갈고 나무하면서 생애를 마치려고 했지 다른 뜻은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배우는 이들이 조금씩 모이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웃집을 사 기거하면서 그 집을 ‘원재(源齋)’라 했다. 해가 오래되자 이르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나 집이 비좁아 더 받아줄 수 없었다. 이때 동리 입구 평탄하고 넓은 곳에 나아가 산을 등지고 시내를 앞면으로 하여 위를 덮어 집을 만드니 남북으로 5가(架)며, 동서로 5영(楹)이었다. 1929년 10월에 짓기 시작하여 다음 해 여름에 마루와 방을 겨우 갖추어 들어와 거처하게 되었다. 가운데 사방을 통하게 하여 마루를 깔고 제갈무후(諸葛武侯)의 말을 취하여 광재당(廣才堂)이라 했다. 좌우로는 각각 앞은 재(齋) 뒤는 실(室)을 두었다. 동재(東齋)를 경서(敬恕), 실을 존성(存省)이라 했는데 평소 안식하기 위함이다. 서재(西齋)를 취변(聚辨), 실을 진수(進修)라 했는데 배우러 오는 사람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동재 앞에 작은 누각을 두었는데 『예기(禮記)』 「학기(學記)」의 ‘북은 오성에 해당되지 않지만, 오색이 이것을 얻지 못하면 빛이 밝지 못한다[鼓無當於五聲 五聲弗得不和 水無當於五色 五色弗得不章]’라는 말에서 취하여 수고루(水鼓樓)라 하고 서재의 난간을 풍천헌(風泉軒)이라 했으며 출입하는 문을 심원문(尋源門)이라 했다. 동쪽 담장 동편에 작은 언덕이 있어 대(臺)로 삼으니 도정절(陶靖節)이 지은 시(詩)의 말을 취해서 유연대(悠然臺)라 했으며 이 모든 것을 합해서 북산정사(北山精舍)라 명명했다”라고 하였다.일제강점기 시기를 살았던 이후는 1870년(고종 7) 10월 26일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 천곡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존후(存厚)·돈학(遯學), 자는 선재(善載), 호는 낭산(朗山)·구시헌(求是軒),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증조는 이정보(李廷輔)이며, 조부는 이인하(李仁夏)이니 현재의 영천시 청통면 후평(後坪)에 처음 옮겨 살았다. 아버지는 이창우(李昌禹)이며, 어머니는 청도김씨(淸道金氏)로 김지령(金志齡)의 딸이다. 부인은 영천이씨(永川李氏)로 이두흠(李斗欽)의 딸이며, 슬하에 1남 5녀를 두니 아들은 이호대(李好大), 사위는 소욱(蘇昱)·최인환(崔寅煥)·서팔수(徐八洙)·정광호(丁光鎬)·이무순(李武淳)이다. 이후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5세에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았기에 아버지께서 비범함을 아껴 산사의 고요한 곳에서 유학을 전공하게 하였으니 여러 경전을 두루 섭렵하는 계기가 되었다. 13세 때 군시(郡試)에 장원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산사에 들어가서 학업을 닦아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天文)·지리(地理)·병서(兵書)·역서(暦書)·산수(算數)·선불제가(仙佛諸家)에 이르기까지 박통했고, 시문(詩文)에도 뛰어났다. 28세에 당대 거유(巨儒)였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문하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했고, 양친을 섬김에 살아 계실 때 정성으로 봉양하고, 상중에는 예를 극진히 하니 범인이 따를 수 없었다. 시국이 혼란해지자 팔공산에 옮겨 은신했다. 1910년(융희 4) 경술국치로 국권 침탈이 되자 통분하는 시 20편을 짓고 일생 동안 일본의 연호를 쓰지 않고 단기만을 사용했다. 나라가 망하고 도학이 추락하며 끊어지는 걱정들을 논저(論著)로 발(發)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라는 강경한 표현들은 한결같이 고의(古義)에 근본하였다. 아울러 항일정신을 제자들에게 고취시켰다. 천곡의 원재(源齋)에서 학도를 받았으나 궁색하고 비좁음을 걱정하여 별도로 북산정사를 세워 강도(講道)하는 곳으로 삼아 평생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문하에 458명의 석학을 배출하였다. 이후 1934년 1월 11일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 대박곡에 정좌(丁坐)향으로 있으며, 김황(金榥)이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다. 저서로는 『무하문답(無何問答)』, 『도자만세무폐론(道者萬世無弊論)』, 『한서율력지해(漢書律曆志解)』, 『이동기이도설(理同氣異圖說)』 등 다수이며, 문집에는 석판본인 『낭산집(朗山集)』 28권 11책 및 속집과 부록이 전한다. .
참고문헌- 『예기(禮記)』
- 『주역(周易)』
- 「북산정사이명(北山精舍二銘)[병소서(幷小序)]」
- 「북산정사기(北山精舍記)」
- 『영천금석록(永川金石錄)』
- 유교넷 http://www.ugyo.net/
- 한국고전종합DB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디지털영천문화대전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