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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정(君子亭)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39.0×96.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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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군자정(君子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9.0×96.0
  • 건물명 군자정(君子亭)
  • 공간명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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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정(君子亭)

군자정(君子亭)



군자정(君子亭)은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55-1에 위치한 迃溪精舍)의 부속 건물로 지어진 정자(亭子)의 편액이다. 군자정은 오계정사가 오계서원(迃溪書院)으로 승격되면서부터 오계서원 내 부속 건물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편액은 오계서원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96㎝, 세로 39㎝이다. ‘군자(君子)’는 송나라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애련설(愛蓮說)」에 “나는, 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이고,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한 자이며, 연꽃은 꽃 중의 군자라고 여긴다[予謂菊花之隱逸者也 牡丹花之富貴者也 蓮花之君子者也]”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는 퇴계 이황이 이 정자의 명칭을 이름 붙이면서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의 됨됨이를 진흙 속에서도 때를 타지 않고 고고하게 피는 연꽃에 비유하여 ‘군자정’이라 한 것이다. 간재 이덕홍은 1570년(선조 3) 오계정사 창건 무렵에 이 정자를 지어서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는 장소로 삼고, 그 왼편에 작은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군자당(君子塘)’이라 명명하였다. 이덕홍이 군자당을 두고 읊은 시가 있어 옮겨보기로 한다.

光霽高懷百世風 광풍제월 고상한 회포 백세의 청풍인데

淸通深入一塘中 맑고 텅 빈 꽃이 연못 속에 깊이 들었네

淤泥不涅眞君子 진흙탕에도 더럽혀지지 않는 참다운 군자

凈友時時對面紅 깨끗한 벗의 붉은 얼굴 때때로 마주하네

군자정에는 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 1709~1788)이 1782년(정조 6) 지은 「군자당기(君子堂記)」가 걸려 있어 그 앞부분만 인용해보기로 한다.

당의 이름을 ‘군자(君子)’라고 한 이유는 군자당 앞에 연못이 있고 못에 연꽃을 심어 향기가 멀리까지 퍼져 군자와 짝하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 이황 선생이 영남에서 도학을 일으켜 문호를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여러 제자가 뛰어났으나 돌아가신 날에 서적을 맡긴 제자는 간재 이덕홍 선생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퇴계 이황 문하의 여러 뛰어난 제자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친밀하고 능히 일을 이루어낸 사람을 일컬을 때는 월천(月川) 조목(趙穆)과 간재 이덕홍 두 선생뿐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살고 계시던 오천 가에 서재를 지어서 수양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군자당(君子塘)이라 부르며 시를 지어 사연을 붙였으니 그 시는 지금 문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군자정 내의 시판으로는 서쪽 벽면에 간재 이덕홍의 오계십경(迃溪十景) 시판(詩板)이, 남쪽 벽면에는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이 1755년(영조 31) 군자정을 대상으로 읊은 절구 3수가 판각되어 시판으로 걸려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소박하게 쓰인 글씨에서 선비의 이상을 본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소개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은 본관이 영천(永川), 자가 굉중(宏仲), 호가 간재(艮齋)이다. 영주 남촌 구룡동[현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장난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에서 독서하였고, 3년 뒤에는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글을 배웠으며, 이듬해인 1559년(명종 14)에는 금난수의 소개로 평생의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만나게 되었다. 이덕홍은 이황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이황의 장손인 이안도(李安道)와도 교유하였고,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 동안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평소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기에 이황 역시 이덕홍을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훌륭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정구(鄭逑)·남치리(南致利)·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혀 조정에 나아가 집현전참봉을 시작으로 종묘서직장, 세자익위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인 광해군을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귀선도(龜船圖)」와 함께 바다에서는 거북선을, 육지에서는 귀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부탁하여 영춘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는 전쟁의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되는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는데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여 관내에 굶어 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1594년(선조 27)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오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장사 지내고 무덤 곁에서 여막 살이를 하였다.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덕홍은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四書), 『심경(心經)』, 고문(古文), 『주자가례(朱子家禮)』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는데, 특히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이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오묘함을 시험하고자 이덕홍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옛 제도와 똑같이 만들어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제작한 선기옥형은 현재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보관되어 있다. 이황뿐만 아니라 권우(權宇), 남치리 등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오계서원(迃溪書院)은 1699년(숙종 25)과 1707년(숙종 33)의 대홍수로 유실되어 1711년(숙종 37) 현재 위치로 이건한 뒤 1722년(경종 2) 4월에 군자당(君子塘)을 설치하고 이어 후손 이경태·이상태 등의 노력으로 1754년(영조 30) 6월에 이전의 것보다 규모를 늘려 군자정(君子亭)을 준공하였다. 군자정이 위치한 곳은 오계서원에서 오른쪽으로 약 20m 떨어진 얕은 구릉지로 남향으로 세워져 있는데 4칸 대청과 오른쪽에 협실 2칸이 있고 정면에는 헌함(軒檻)이 달린 툇마루가 있다. 대청에는 다섯 개의 둥근 기둥이 있고 주간에 대들보를 남북으로, 소보(小椺)를 동서로 십자형으로 연결하여 주역의 선천팔괘(先天八卦)를 상징하고 서까래의 배열과 도리의 이음새 및 목재 장식은 후천팔괘(後天八卦)를 상징하였다. 군자정은 1992년 11월 2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6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장재호·김우동 역, 『간재집』, 한국국학진흥원, 2018이재곤, 『오계서원』, 오계서원, 2008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