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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위료(驗爲寮)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39.0×69.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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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험위료(驗爲寮)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9.0×69.0
  • 건물명 험위료(驗爲寮)
  • 공간명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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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위료(驗爲寮)

험위료(驗爲寮)



험위료(驗爲寮)는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55-1에 위치한 오계서원(迃溪書院)의 강당(講堂)인 명륜당(明倫堂)에 딸린 서쪽 방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오계서원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69㎝, 세로 39㎝이다. 험위료 편액 명칭을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이 퇴계 이황에게 물어서 정한 것으로 보아 이덕홍이 오계정사를 건립한 당시부터 있었으나, 이때의 정확한 위치와 기능에 대해서는 자료가 전하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다만, 오계서원으로 승격되면서 명륜당 서실(西室)에 편액을 게판한 것으로 보인다. ‘험위(驗爲)’는 송나라 남당(南塘) 진백(陳柏)이 공부와 수양에 필요한 지침을 담은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가운데 “일이 이르면 이에 응하되 행위에서 배운 것을 징험하고, 하늘의 밝은 명이 밝게 빛나니 항상 눈을 그곳에서 떼지 말라[事至斯應 則驗于爲 明命赫然 常目在之]”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학자에게 있어 행동은 곧 앎의 실천인 것이다. 이 글은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 매우 요긴한 글이라 하여 태주(台州) 상채서원(上蔡書院)의 원생들에게 일일이 익히게 하였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덕홍은 험위료를 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도도한 육구연은 마음이 일에 미혹되었고
온 세상 어지러워 일이 마음에 얽히었네
외물에 응하면서도 마음은 깨어있어야 하리니
진백의 잠 본받아 서로 수양하면 실로 좋겠네

滔滔陸氏心迷事

擧世紛紛事累心

酬酢還須中惺惺

不妨交養效陳箴

글씨는 처음에 명필인 석봉 한호(韓濩, 1543~1605)가 썼으나 대홍수로 유실되고, 현재의 글씨는 병암(屛巖) 이수인(李守仁, 1690~1737)이 쓴 해서체이다.

‘驗’ 자의 ‘馬’의 왼쪽의 긴장감 있는 곡선에서 어떠한 일에 이르러 바로 뛰어나가 민첩하게 행동에 옮기려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소개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은 본관이 영천(永川), 자가 굉중(宏仲), 호가 간재(艮齋)이다. 영주 남촌 구룡동[현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장난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에서 독서하였고, 3년 뒤에는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글을 배웠으며, 이듬해인 1559년(명종 14)에는 금난수의 소개로 평생의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만나게 되었다. 이덕홍은 이황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이황의 장손인 이안도(李安道)와도 교유하였고,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 동안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평소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기에 이황 역시 이덕홍을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훌륭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정구(鄭逑)·남치리(南致利)·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혀 조정에 나아가 집현전참봉을 시작으로 종묘서직장, 세자익위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인 광해군을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귀선도(龜船圖)」와 함께 바다에서는 거북선을, 육지에서는 귀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부탁하여 영춘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는 전쟁의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되는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는데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여 관내에 굶어 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1594년(선조 27)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오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장사 지내고 무덤 곁에서 여막 살이를 하였다.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덕홍은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四書), 『심경(心經)』, 고문(古文), 『주자가례(朱子家禮)』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는데, 특히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이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오묘함을 시험하고자 이덕홍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옛 제도와 똑같이 만들어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제작한 선기옥형은 현재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보관되어 있다. 이황뿐만 아니라 권우(權宇), 남치리 등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입구에서 바라보는 쪽으로 우측에 있는 2칸의 방을 상실(上室)이라 하고 좌측에 있는 2칸의 방을 험위료(驗爲寮)라 한다. 명륜당(明倫堂)은 기본적으로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으나, 이외에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도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명륜당의 북쪽 벽면에는 나학천(羅學川, 1658~1731)이 찬(撰)한 ‘오계서원이건기(迃溪書院移建記)’가 걸려 있고, 동쪽 벽면에는 홍천서(洪天敍)와 송광심(宋光心)의 시판이, 서쪽 벽면에는 김응조(金應祖)와 권성오(權省吾)의 시판이 걸려 있다. 그리고 대청 정면에는 오계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명륜당은 설립 당시에는 모두 10칸 규모였으나, 복설하면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축소한 납도리 소로수장집이다. 강당 앞에 단을 두어 마당을 조성하였으므로 기단은 높지 않다. 널찍한 자연석 주초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전면 중앙의 기둥만 원주(圓柱)를 사용하였다. 평면구성은 중앙 4칸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2칸 온돌방을 배치한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이다. 상부가구는 5량가인데 종량(宗樑) 위에는 제형판대공(梯形板臺工)을 세웠고,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한식골기와를 이었다.

참고문헌
  • 장재호·김우동 역, 『간재집』, 한국국학진흥원, 2018이재곤, 『오계서원』, 오계서원, 2008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