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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주정사(1)鳳洲精舍(1)

영양남씨 봉주공파英陽南氏 鳳洲公派

62.5×123.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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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봉주정사(1)鳳洲精舍(1)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62.5×123.5
  • 건물명 봉주정사(1)鳳洲精舍(1)
  • 공간명 영양남씨 봉주공파(英陽南氏 鳳洲公派)
  • 서예가 0
  • 위치정보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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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주정사(1)鳳洲精舍(1)

봉주정사(1)鳳洲精舍(1)



봉주정사(鳳洲精舍)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에 위치한 봉주정사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영양남씨 봉주공파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23.5㎝, 세로 62.5㎝이다. 봉주정사는 봉주(鳳洲) 남국주(南國柱, 1690~1759)가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1724년(경종 4)에 건립한 정사이다. 봉주정사의 원래 위치는 지금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는데, 최근에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봉주(鳳洲)’라는 말은 남국주가 평소 산수를 좋아하여 꽃 피는 아침이나 달 뜨는 저녁이면 거처하던 바의 대황산 아래의 물가를 지팡이 짚고 소요하면서 마음을 수양한 데서 비롯되었다. 또 남국주는 자신의 호를 봉주(鳳洲)라고 하였다. 봉주정사 편액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봉주 남국주가 「봉주(鳳洲)」를 읊은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何年丹穴鳥 어느 때에나 단혈의 봉황새가
來浴碧波磯 이곳 푸른 바닷가에서 목욕을 할까나
今値聖明世 지금 훌륭한 임금의 태평성대를 만났으니
佇看覽德輝 우두커니 서서 덕휘를 바라본다네

단혈(丹穴)은 봉황이 사는 산 이름이고, 덕휘(德輝)는 가의(賈誼)의 「조굴원부(弔屈原賦)」에 “봉황은 천 길의 하늘을 날다가, 성군의 덕이 빛남을 살피고 내려온다네[鳳凰翔于千仞兮 覽德輝而下之]”라고 한 데서 온 말로, 군자가 난세(亂世)에는 세상에 나가지 않고 숨었다가 성군(聖君)이 나온 뒤에야 세상에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거친 필획으로 썼으나 전체적 조형은 단정하다. 대봉산 아래 물 좋은 곳에 집을 짓고 자연을 벗하며 정신을 평온하게 하지만 공부는 안일하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양남씨 봉주공파(英陽南氏 鳳洲公派) 소개



남국주(南國柱, 1690~1759)의 자는 하중(廈中)이고, 호는 봉주(鳳洲)이다. 조부는 남상소(南尙召)이고, 부친 남필명(南弼明)과 모친 전적(典籍) 정요천(鄭堯天)의 딸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6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약관(弱冠)의 나이부터 거침없이 시를 지었는데, 단양에서 채헌징(蔡獻徵, 1648~1726)과 이별하면서 준 시와 제주판관으로 가는 당숙부 우암(寓庵) 남구명(南九明, 1661~1719)을 전송하면서 지은 시는 모두 22세 전후에 지은 것이다. 고을의 수령이 만나보기를 간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한 일이 있었는데, 그해에 지방시험에서 1등을 하였으나 수령이 고시관(考試官)으로 참여하여 명부(名簿)를 열어보고 지난번의 유감 때문에 그의 이름을 명부에서 빼버렸다. 그러나 그는 웃으면서 “이것도 운명이다. 과거라는 것은 녹봉을 받기 위한 매개체일 뿐이다” 하고 과거 시험장을 나와 세상과 인연을 끊어버렸다. 농사와 양잠의 조만(早晩)과 전곡(錢穀)의 출입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은 채 고금의 서책만 취하여 숙독하고 완미하였다. 만년에 『곤범(梱範)』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자손들에게 남겼는데, 그 책은 모두 상·중·하 3편으로 나누어져 있고 23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버이에게 효도할 것, 임금에게 충성할 것, 가정에서 모범을 보일 것, 자식을 가르칠 것,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낼 것, 종족 간에 화목할 것, 친구 간에 신의가 있을 것 이렇게 7개는 천륜과 인륜에 있어서 없앨 수 없는 것이므로 상편(上篇)에 두었다. 제사를 받들 것, 손님을 접대할 것, 혼인을 신중히 할 것, 학문에 오로지 힘쓸 것, 이단을 배척할 것, 농사를 권장할 것, 근검절약을 숭상할 것 이렇게 7개는 사람들이 항상 행해야 하는 큰 절차이므로 중편(中篇)에 두었다. 그리고 하편(下篇)에 둔 마음을 바르게 할 것, 언행을 삼갈 것, 독실히 공경할 것, 겸손하고 양보할 것, 기강을 진작할 것, 위의(威儀)를 지킬 것, 음덕을 널리 베풀 것, 가례를 준수할 것, 향약을 지킬 것 9개 조항은 몸가짐과 행실에 관계되는 커다란 방편이다.

19세기 퇴계학맥의 종장인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이 지은 남국주의 묘갈명의 명(銘) 부분만 옮겨보기로 한다.

以渺然者身 아득히 작은 몸으로
而竆天地之大 원대한 세상의 이치를 다하였고
以隙駒之景 지극히 짧은 세월 안에
而極元會之娧 우주의 순환 원리를 규명하였네
會通乎河洛之原하도 낙서의 근원을 널리 통달하여
而悟聖神之指掌성신의 가리키는 바를 깨달았네
剖析於朱陸之辨주자와 육구연의 변설을 분석하여
而識道術之深廣도술의 깊고 광대함을 알았다네
夫何獨爲而獨書어찌하여 홀로 행하고 홀로 글을 읽어
吁嗟古稽而今居슬프게도 옛것을 상고하여 오늘을 살았나
吾知神遊乎太空나는 안다네, 정신이 우주에 노닌
然後得返乎鴻濛뒤에야 홍몽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유고로 시문집인 『봉주집(鳳洲集)』이 전하는데, 주목할 작품으로 우리나라 유학자들 가운데 안향(安珦)을 비롯해 문묘에 배향된 유학자들에 대해 지은 「동방종사제선생찬(東方從祀諸先生贊)」과 주역의 원리와 체계를 기본적으로 정리한 「역범통록(易範通錄)」·「발몽도해(發蒙圖解)」·「가례총설(家禮叢說)」 등이 있다.

정사 주위는 방형(方形)의 토석 담장을 둘렀고, 전면에는 4개 기둥으로 문을 세웠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붙어 있으며, 대청의 중앙 상단부에 전서체와 행서체로 ‘봉주정사(鳳洲精舍)’라고 쓴 현판 2개가 걸려 있다. 왼쪽 온돌방 위에는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이 쓴 ‘봉주정사기(鳳洲精舍記)’ 현판이 걸려 있다. 대청에는 4짝 분합(分閤)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었으며, 앞쪽으로 반 칸 규모의 마루를 내고 난간을 설치하였다. 난간 왼쪽 천장에는 ‘극복재(克復齋)’, 오른쪽 천장에는 ‘경의당(敬義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봉주정사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어간(御間)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전형적인 중당협실형(中堂挾室型)의 일자형(一字形) 건물이다. 대청의 전면에는 4짝 분합(分閤) 들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으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退間)을 두고 그 앞에는 헌함(軒檻)을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 『봉주선생문집』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