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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재(克復齋)

영양남씨 봉주공파英陽南氏 鳳洲公派

44.5×90.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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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극복재(克復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4.5×90.0
  • 건물명 극복재(克復齋)
  • 공간명 영양남씨 봉주공파(英陽南氏 鳳洲公派)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1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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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재(克復齋)

극복재(克復齋)



극복재(克復齋)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에 위치한 봉주정사(鳳洲精舍) 서재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영양남씨 봉주공파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15.2㎝, 세로 47.3㎝이다. ‘극복(克復)’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줄인 말이며, 『논어』 「안연(顔淵)」에 “안연이 인(仁)을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자기의 사욕(私欲)을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을 실천하는 것이니, 하루라도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仁)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안연이 ‘세부 조목을 가르쳐주십시오’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마는 것이다’ 하니, 안연이 말하기를 ‘제가 민첩하지는 못하지만 이 말씀대로 실천해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봉주정사는 봉주(鳳洲) 남국주(南國柱, 1690~1759)가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1724년(경종 4)에 건립한 정사이다. 봉주정사의 원래 위치는 지금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는데, 최근에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남국주는 평소 산수를 좋아하여 꽃 피는 아침이나 달 뜨는 저녁이면 거처하던 바의 대황산 아래의 물가를 지팡이 짚고 소요하면서 마음을 수양하였다. 스스로 호를 ‘봉주(鳳洲)’라고 한 것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봉주 남국주가 지은 「극복재기(克復齋記)」를 우리말로 옮겨보기로 한다.

대개 극기복례의 공부는 오로지 사물(四勿)에 있다. 혹여라도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방해되지 않도록 하며, 혹여라도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서 안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삼가라. 내외(內外)가 번갈아 나아가는 것이 인(仁)을 실천하는 지극한 방도이다. 그렇다면 사물(四勿)이 인(仁)의 수단이고 극복(克復)이 곧 인을 실천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러니 인(仁)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극복(克復)에 있지 않겠는가. 대저 기(己)라는 것은 인욕의 사사로움이고, 예(禮)라는 것은 하늘의 공통된 이치라서, 하나의 마음속에 두 가지가 함께 공존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극(克)과 불극(不克), 복(復)과 불복(不復)은 손을 뒤집었다 엎었다 하는 것과 같고 팔을 굽혔다 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 기미(機微)는 나에게 달려 있지 남에게서 말미암겠는가. 이 극복(克復) 두 글자는 공자가 안연(顔淵)에게 전수해준 심법(心法)으로 그 조목(條目)은 오직 시청언동(視聽言動) 사물(四勿)에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고, 기어이 예를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갈필(渴筆)의 억센 필획에서 묻어나온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을 터이다”라고 외치는 것 같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양남씨 봉주공파(英陽南氏 鳳洲公派) 소개



남국주(南國柱, 1690~1759)의 자는 하중(廈中)이고, 호는 봉주(鳳洲)이다. 조부는 남상소(南尙召)이고, 부친 남필명(南弼明)과 모친 전적(典籍) 정요천(鄭堯天)의 딸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6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약관(弱冠)의 나이부터 거침없이 시를 지었는데, 단양에서 채헌징(蔡獻徵, 1648~1726)과 이별하면서 준 시와 제주판관으로 가는 당숙부 우암(寓庵) 남구명(南九明, 1661~1719)을 전송하면서 지은 시는 모두 22세 전후에 지은 것이다. 고을의 수령이 만나보기를 간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한 일이 있었는데, 그해에 지방시험에서 1등을 하였으나 수령이 고시관(考試官)으로 참여하여 명부(名簿)를 열어보고 지난번의 유감 때문에 그의 이름을 명부에서 빼버렸다. 그러나 그는 웃으면서 “이것도 운명이다. 과거라는 것은 녹봉을 받기 위한 매개체일 뿐이다” 하고 과거 시험장을 나와 세상과 인연을 끊어버렸다. 농사와 양잠의 조만(早晩)과 전곡(錢穀)의 출입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은 채 고금의 서책만 취하여 숙독하고 완미하였다. 만년에 『곤범(梱範)』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자손들에게 남겼는데, 그 책은 모두 상·중·하 3편으로 나누어져 있고 23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버이에게 효도할 것, 임금에게 충성할 것, 가정에서 모범을 보일 것, 자식을 가르칠 것,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낼 것, 종족 간에 화목할 것, 친구 간에 신의가 있을 것 이렇게 7개는 천륜과 인륜에 있어서 없앨 수 없는 것이므로 상편(上篇)에 두었다. 제사를 받들 것, 손님을 접대할 것, 혼인을 신중히 할 것, 학문에 오로지 힘쓸 것, 이단을 배척할 것, 농사를 권장할 것, 근검절약을 숭상할 것 이렇게 7개는 사람들이 항상 행해야 하는 큰 절차이므로 중편(中篇)에 두었다. 그리고 하편(下篇)에 둔 마음을 바르게 할 것, 언행을 삼갈 것, 독실히 공경할 것, 겸손하고 양보할 것, 기강을 진작할 것, 위의(威儀)를 지킬 것, 음덕을 널리 베풀 것, 가례를 준수할 것, 향약을 지킬 것 9개 조항은 몸가짐과 행실에 관계되는 커다란 방편이다.

유고로 시문집인 『봉주집(鳳洲集)』이 전하는데, 주목할 작품으로 우리나라 유학자들 가운데 안향(安珦)을 비롯해 문묘에 배향된 유학자들에 대해 지은 「동방종사제선생찬(東方從祀諸先生贊)」과 주역의 원리와 체계를 기본적으로 정리한 「역범통록(易範通錄)」·「발몽도해(發蒙圖解)」·「가례총설(家禮叢說)」 등이 있다.

정사 주위는 방형(方形)의 토석 담장을 둘렀고, 전면에는 4개 기둥으로 문을 세웠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붙어 있으며, 대청의 중앙 상단부에 전서체와 행서체로 ‘봉주정사(鳳洲精舍)’라고 쓴 현판 2개가 걸려 있다. 왼쪽 온돌방 위에는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이 쓴 ‘봉주정사기(鳳洲精舍記)’ 현판이 걸려 있다. 대청에는 4짝 분합(分閤)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었으며, 앞쪽으로 반 칸 규모의 마루를 내고 난간을 설치하였다. 난간 왼쪽 천장에는 ‘극복재(克復齋)’, 오른쪽 천장에는 ‘경의당(敬義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봉주정사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어간(御間)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전형적인 중당협실형(中堂挾室型)의 일자형(一字形) 건물이다. 대청의 전면에는 4짝 분합(分閤) 들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으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退間)을 두고 그 앞에는 헌함(軒檻)을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 『봉주선생문집』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