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공간별 보기

설죽당(雪竹堂)

봉화 법전 진주강씨 입재문중(奉化 法田 晉州姜氏 立齋門中)

36.0x97.0x3.1 / 행서(行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설죽당(雪竹堂)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36.0x97.0x3.1
  • 건물명 설죽당(雪竹堂)
  • 공간명 봉화 법전 진주강씨 입재문중(奉化 法田 晉州姜氏 立齋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봉화군 법전 성잠마을
  •  
r0049_1.jpg
설죽당(雪竹堂)

설죽당(雪竹堂)


설죽당(雪竹堂)은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성잠마을에 있는 누정인 뇌풍정(雷風亭)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뇌풍정은 법전 입향조인 도은(陶隱) 강각(姜恪)의 손자인 설죽당(雪竹堂) 강재숙(姜再淑, 1677~1758)과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 1689~1756) 형제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6대손인 요육재(了育齋) 강욱(姜昱, 1866~1912)이 1907년 사제 강훈(姜鑂, 1874~1941)과 종형 강일(姜鎰, 1861~1925) 등과 협력하여 두 분이 살던 성잠 터에 신축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이며 앞면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설죽당’은 강재숙의 호로, 눈 속에서도 휘지 않고 곳곳이 서 있는 대나무이니 어떠한 난관에도 지조를 굽히지 않는 자세를 의미한다. 뇌풍정 편액뿐만 아니라 이곳에 걸려 있는 설죽당과 입재의 편액 글씨 또한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1869~1953)이 행서체로 쓴 것이다.

눈 속에 시들지 않는 대나무는 지조를 의미한다. 튼실하고도 유려하다. 필획이 유순하고 맺고 풀림이 원활하여 막힘이 없다. 운필의 시작을 붓털의 방향을 진행과 같은 순방향으로 시작하면(圓筆) 종이와 마찰이 부드러워 필획이 유순하고, 붓털의 방향을 진행과 다른 어슷한 방향으로 시작하면(方筆) 마찰이 발생하여 필획에 느낌이 있다. 이 편액의 글씨는 대체적으로 원필로 시작한 순방향진행으로 보인다. 세 글자 가운데 죽(竹) 한 자를 살짝 작게 하여 좌우 자간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였고, 마무리 기세를 좌하단으로 꺾어 처리한 덕분에 여운이 그 공간에 가득하게 되었다. 짜임새 있는 구성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봉화 법전 진주강씨 입재문중(奉化 法田 晉州姜氏 立齋門中) 소개


강재숙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청보(靑甫), 호는 설죽당(雪竹堂)이다. 도은(陶隱) 강각(姜恪)의 손자이고, 잠계(潛溪) 강우(姜鄅)의 장자이다. 문장에 능하고 필법이 뛰어났다. 특히 왕희지의 참된 도리를 얻어 글씨의 오묘함이 신의 경지에 들었다고 한다. 『영가읍지』 등의 기록을 보면 “전주이씨(全州李氏)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와 해평윤씨(海平尹氏) 백하(白下) 윤순(尹淳)과 함께 당대 명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영조 무신년 이인좌가 일으킨 무신란에 창의하여 격문을 붙이고 열읍에 통문을 보내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충의지심을 격동케 하였다. 특히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그가 지은 격문의 글과 글씨를 보고 크게 감탄하여 상찬을 하였다.”고 전해온다. 관찰사 법천(法川) 강윤(姜潤, 1711∼1782)은 족조(族祖) 강재숙의 유덕을 추모하는 제문에서 “문장과 필법에 뛰어났다. 선친과 같은 해에 태어나고 동문수학하였던 일을 회고하였다. 천성이 단정하고 온화하였고 재주와 학식이 고매하였으며, 일찍 과거에서 뛰어난 명성이 있었으나 궁벽한 마을에서 살면서 서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하였으며 나이가 들수록 고아하고 뜻은 더욱 돈독하였고, 기운과 정신이 왕성하여 80세가 넘어서도 눈과 귀가 밝고 걸음걸이가 소년 못지않아 거의 지상의 신선과 가까웠다.”고 하였다. 저서에 『산재차록山齋箚錄』이 있었으나 화재로 전하지 않는다. 후사가 없어 그의 아우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의 아들 택일(宅一)을 양자로 삼았고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봉화의 네 문장가 즉 내성사로(乃城四老)의 한 사람인 모산(茅山) 이동완(李棟完, 1651∼1725)이 관동으로 유람 가는 강재숙에게 준 시가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남아가 기이한 기상 지녔건만
어찌 궁벽한 시골만 지키리오
아득히 일상적 변화 뛰어넘고
펄럭이며 먼 유람을 일삼으리
부상의 나무로 소매를 떨치고
만폭동의 물로 갓을 씻으리라
맹생이 우임금 유적을 엿본들
그대의 장대한 완상만 못하리라

男兒負奇氣
何得守窮陬
邈爾超常戀
翩然事遠遊
拂袖扶桑樹
濯纓萬瀑流
孟生窺禹穴
壯賞似君不

진주강씨 법전 문중의 세거지인 봉화군 법전면은 문수산과 태백산을 끼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안동부 춘양현에 편입되었다가 순흥부에 속하기도 하였다. 진주강씨가 법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한산군수를 역임한 강덕서(姜德瑞, 1540~1614)의 후손인 강윤조(姜胤祖, 1568~1643)와 그의 두 아들 잠은(潛隱) 강흡(姜恰)과 도은(陶隱) 강각(姜恪)이 병자호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법전리로 입향하면서부터이다. 강흡과 강각은 부모님을 모시고 1636년(인조 14) 12월 파주 교하에서 출발하여 1637년(인조 15) 1월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의 조카사위인 권산기(權山起)의 시골 농장이 있는 법전리 성재미[성잠星岑]에 우거(寓居)하였다. 법전 진주강씨는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나뉘어 마을의 토대를 형성하였는데, 양지마을에는 주로 소론으로 활동했던 강각의 후손들이 거주하였고, 음지마을에는 노론의 당색을 띠었던 강흡의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명실상부한 진주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양지마을에는 도은종택과 해은구택 등이 있으며, 음지마을에는 기헌고택과 경체정 등이 있다.

법전은 괴리 또는 유천이라고 하는데, 법전이라는 지명은 법흥사라는 사찰 앞에 있던 큰 밭을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법전천의 옛 이름인 유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유(柳)자의 훈인 ‘버들’이 ‘법(法)’으로 변해 법계(法溪), 법전천(法田川)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다. 강흡과 강각 형제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의 대명의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파주로 돌아가지 않고 법전에 정착하였다. 이들 형제는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포옹(抱翁) 정양(鄭瀁),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손우당(遜憂堂) 홍석(洪錫) 등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칭송되어 숭정처사(崇禎處士)로도 불렸다. 또한 강각은 태백오현에 더하여 태백육은(太白六隱)으로 일컬어졌고, 중국 동진 때의 시인 도잠 도연명의 ‘도(陶)’를 따서 ‘도은(陶隱)’이라 자호하였다. 남송을 인정하지 않아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채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은거했다는 도연명의 이야기는 버드나무를 신하의 충절에 빗대는 전통을 낳았다. 따라서 입향조인 강흡과 강각 형제가 견지했던 숭명배청의 의리가 도연명의 고사와 상통하여 법전천의 어원인 유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법전마을은 태백산을 향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 비룡승천형의 풍수지리학적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 법전면 풍정리와 봉성면 창평리 사이에 있는 갈방산과 가마봉이라는 두 개의 문필봉을 끼고 있어 문과 급제자 25명(음지마을 13명, 양지마을 12명), 무과 급제자 2명, 소과 합격자 31명과 고시 합격자 13명, 그리고 박사와 학자들을 대거 배출하여 영남의 명문가로서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참고문헌
  • 이동완李棟完, 「증강청보(재숙)김강지행贈姜淸甫[再淑]金剛之行」, 『모산집茅山集』 권2.
  • 진주강씨 법전문중 응교공 종회, 『진주강씨 법전문중지』, 2015.
  • 한국국학진흥원자료부, 『진주강씨 법전문중 도은종택 및 석당공』,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국학자료목록집 41,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