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린당(1)講麟堂
강린당(講麟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서미1리에 위치한 서간사(西磵祠) 강당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안동김씨 소산문중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48.5㎝, 세로 65.5㎝이다. ‘강린’은 『인경(麟經)』을 강론한다는 뜻이다. 『인경』은 『춘추(春秋)』를 말한다. 서간사는 1669년(현종 10) 지방 유림에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학문과 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하였고, 1786년(정조 10)에 사액되었다. 그러나 1870년(고종 7) 흥선대원군의 훼철령에 따라 사당이 철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곳에 강린당(講麟堂)이라는 강당을 지어 강독하는 장소로 삼고서 『인경』을 강론하였다. 한편 1820년(순조 20) 봄에 김상헌의 7세손인 김학순(金學淳, 1767~1845)이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목석거유허비(木石居遺墟碑)를 세운 바위에 ‘목석거(木石居)’란 세 글자를 새겼다. 목석거유허비는 1710년(숙종 36) 봄에 안동부사 이정신(李正臣)이 세운 것이다. 또 김학순은 서미1리 마을로 들어가기 전 오른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은자암(隱者巖)’이란 글씨와 그 아래에 ‘해동수양산남율리(海東首陽山南栗里)’ 여덟 글자를 새겨 김상헌의 절의 정신을 기렸다. 각자(刻字)한 바위와 글씨는 모두 현존하고 있다. 글씨는 김학순(金學淳, 1767~1845)이 쓴 해서체이다.
안동김씨 소산문중(安東金氏 素山門中) 소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본관이 안동, 자가 숙도(叔度), 호가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이다. 김상헌은 한성부 장의동 청풍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으며,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김대효(金大孝)에게 입양되었다. 1585년(선조 18)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진한고문(秦漢古文)을 수용하고 김식(金湜)에서 김덕수(金德秀)를 거쳐 윤근수로 이어지는 도학(道學)을 공부하였다. 또 이정귀(李廷龜)·신흠(申欽)·장유(張維)·이식(李植)·김류(金瑬)·신익성(申翊聖)·이경여(李敬輿)·이경석(李景奭)·김집(金集) 등과 교유하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선조 29) 임진왜란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부수찬, 좌랑, 부교리를 거쳤다. 1601년(선조 34) 32세의 나이로 제주안무어사로 차출되어 길운절(吉雲節) 등이 일으킨 반란의 진상을 파악하고 왕명을 전하였는데 그 6개월간의 경과를 기록한 『남사록(南槎錄)』이 전한다. 1626년(인조 4) 명장 모문룡(毛文龍)의 무고를 해명하기 위해 정사(正使) 남이웅(南以雄), 서장관(書狀官) 김지수(金地粹) 등과 함께 성절사 겸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당시 육로는 누루하치[奴爾哈齊]가 장악하고 있어 부득이 해로로 갔는데, 당시 사행 중의 견문을 기록한 『조천록(朝天錄)』이 전한다.김상헌이 안동에 머물렀던 기간은 약 7년이다. 체류한 시기는 두 차례로 확인된다. 첫 번째는 1618년(광해 10)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해야 한다는 북인 정권의 혼정에 모든 것을 단념하고 어머니 이 부인을 모시고 풍산으로 낙향하여 1621년(광해 13) 봄 양주 석실로 돌아가기까지 3년간 체류하였다. 이때 청원루에 기거하면서 삼구정이나 주변의 경치나 인물들을 탐방한 것으로 확인된다. 두 번째는 병자호란이 발발한 지 한 달 만에 인조가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고 남한산성을 나갈 때 그는 병든 몸으로 하직 인사를 고하고 마침내 정축년인 1637년(인조 15) 2월 7일 풍산으로 낙향했다. 이때 김상헌의 낙향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김상헌은 「풍악문답(豊岳問答)」과 「답의인서(答擬人書)」를 지어서 해명한다. 이 중에 「풍악문답」에 관한 내용만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어떤 이가 묻기를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을 나갈 때 그대가 따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만약 성 밖 한 걸음의 땅이라도 밟았다면 이는 순(順)을 버리고 역(逆)을 따르는 날이다. 대의(大義)가 있는 곳에는 털끝만큼도 구차스러워서는 안 된다. 임금이 사직에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이 신하의 의리이다. 간쟁하였는데도 그 말이 쓰이지 않으면 물러나 스스로 안정하는 것도 신하의 의리이다. 옛사람이 한 말에, 신하는 임금에 대해서 그 뜻을 따르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사군자(士君子)의 나가고 들어앉은 것이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오직 의를 따를 뿐이다. 예의를 돌보지 않고 오직 명령대로만 따르는 것은 바로 부녀자나 환관들이 하는 충성이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김상헌의 손자인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의 「화산기(花山記)」에 의하면 김상헌은 1638년(인조 16) 2칸의 작은 집을 짓고 방 안에는 ‘만석산방(萬石山房)’이라는 당호를 걸고, 방 밖에는 ‘목석거(木石居)’라는 당호를 걸었다. 김상헌은 이곳에서 느낀 감회를 시로 표현하였다.石室先生一角巾석실 선생 머리 위에 각건을 쓰고서 暮年猿鶴與爲群노년에 원숭이와 학과 함께 살아가네秋風落葉無行跡가을바람에 낙엽 지고 인적 하나 없는데獨上中臺臥白雲홀로 중대사에 올라 백운루에 눕네이 시는 청음이 서미동 목석거에서 읊은 것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손자 김수증, 김수항, 증손자 김창협·김창흡, 그리고 김학순 등 많은 사람들이 이 시에 차운하였다.김상헌은 1640년(인조 18) 12월 심양으로 압송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2년 9개월간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 기간에 김상헌은 북벌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형식적으로는 은거 생활을 지향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청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는 시간이었다. 김상헌은 1640년(인조 18) 12월 심양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6년간 억류되어 있으면서 북벌에 대한 집념을 더욱더 확고히 한다. 그리고 심양에서 돌아온 이후부터는 북벌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 실천 방안을 모색한다. 이런 그의 북벌사상은 효종의 국가통치이념과 맞물려 한층 더 급물살을 타게 되지만, 북벌의 꿈을 이루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
참고문헌- 황만기, 「청음 김상헌 시문학에 나타난 의리정신」,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 황만기, 「안동체류기에 있어서의 청음 김상헌의 활동과 문학」, 『국학연구』20집, 한국국학진흥원, 2012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안동문화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