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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재(輔仁齋)

삼계서원(안동권씨충재종택)三溪書院(安東權氏冲齋宗宅)

34.0×83.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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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보인재(輔仁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4.0×83.0
  • 건물명 보인재(輔仁齋)
  • 공간명 삼계서원(三溪書院)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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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재(輔仁齋)

보인재(輔仁齋)



보인재(輔仁齋)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174(생기마1길 24)에 위치한 삼계서원(三溪書院)의 별당인 문회당(文會堂)에 딸린 재(齋)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삼계서원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83㎝, 세로 34㎝이다. ‘보인(輔仁)’은 『논어』 「안연(顔淵)」에서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문으로써 벗을 사귀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문회당은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1654~1725)의 부친인 권유(權濡)가 삼계서원의 원장으로 있을 때 지은 별당이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김추길(金秋吉, 1603~1686)이 지은 「문회당기(文會堂記)」에 실려 있다.

삼계서원은 1588년(선조 21) 지방 유림의 공의로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된 서원으로, 1660년(현종 1)에 이곳의 지명을 따서 ‘삼계’라고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역할을 담당하다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51년 복원되었고 2002년 2월 14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17호로 지정되었다. 삼계서원 내의 각 건물에 대한 명칭은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이름 붙인 것으로, 사당을 충정공사(忠定公祠), 강당(講堂)을 정일당(精一堂), 동재(東齋)를 사무사(思無邪), 서재(西齋)를 무불경(毋不敬), 정문을 환성문(喚惺門), 문루를 관물루(觀物樓)라고 하였다. 삼계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따랐다. 서원 출입은 전면에 자리하고 있는 중층의 관물루 아래에 설치된 환성문으로 들 수 있도록 하였으며, 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강당이 자리 잡고 전면 좌우에 동재·서재가 있다. 강당 오른쪽으로 돌아들면 사당인 충정공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동재 전면 오른쪽에는 1906년(광무 10) 사림에서 세웠다는 신도비(神道碑)와 비각(碑閣)이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기개 있게 쓴 글씨와 시원한 여백으로 인해 맑은 기운이 가득하다. 굵은 획과 가는 획이 적절하게 섞여 지루함이 없다. 가운데 ‘仁’ 자의 편안함은 학문을 통해 만난 벗과의 사귐에서 덕을 갖춘 사람의 모습처럼 보인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삼계서원(三溪書院) 소개



권벌(權橃, 1478~1548)은 닭실마을의 안동권씨 입향조로, 자가 중허(仲虛), 호가 충재(冲齋)·훤정(萱亭)·송정(松亭)이다. 아버지 권사빈(權士彬)은 안동 우향계인 진솔회(眞率會)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는데, 이때 회원들이 계축으로 만들어 나누어 소장한 『우향계축(友鄕契軸)』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진솔회의 회원은 모두 15명[이굉(李浤), 이명(李洺), 정원로(鄭元老), 이영전(李永銓), 김윤리(金允离), 박숙(朴䃞), 권숙균(權叔均), 정희주(鄭希周), 구인정(具仁貞), 권철종(權哲從), 권철경(權哲經), 권사빈(權士彬), 권사영(權士英), 남팔준(南八俊), 남경지(南敬智)]이다. 권벌은 1496년(연산 2)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실 1504년(연산 10)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과거 답안지 책문에 ‘처(處)’ 자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이는 연산군이 김처선(金處善)의 직간(直諫)에 노하여 김처선을 죽이고는 중외(中外)의 문자에 ‘처(處)’ 자와 ‘선(善)’ 자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충재는 조선시대 4대 사화에서 갑자년의 사화를 제외한 나머지 세 종류의 사화를 몸소 겪으면서 이를 슬기롭게 극복한 인물이다. 화변이 닥칠 때마다 번번이 기지를 발휘한 그는 무오사화(1498년)에는 화를 당한 선비들을 신원하였고, 기묘사화(1519년)에는 삼척부사로 재임 중에 올바른 의론을 펼치다가 파직되어 고향인 안동 도촌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듬해(1520년)에 43세의 나이로 안동 도촌에서 내성현 닭실로 이거하여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후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절의를 지키면서 진퇴를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을사사화(1545) 때는 화변을 진정시켜 만세에 풍교(風敎)를 수립하였으나,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인하여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3월에 운명하였다. 1570년(선조 3) 충정(忠定)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592년(선조 25) 불천위(不遷位)의 명이 내려졌으며, 1601년(선조 34)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위패를 봉안하였고 삼계서원은 1660년(현종 1)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46년(영조 22) 영조가 권벌의 수진본 『근사록』을 열람하고는 새로 간행한 『근사록』 한 질을 하사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정조가 『심경』 한 질을 더 하사하고 석판에 새긴 「어제서문(御製序文)」을 함께 내렸다. 「어제서문」은 정조가 지었고 글씨는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썼으며, 현재 청암정에 걸려 있다. 한편 1851년(철종 2)과 1853년(철종 4) 그리고 1883년(고종 20)에는 유생들이 문묘 배향을 청원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권벌의 덕행과 절의는 세인들의 추종을 받아왔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일을 먼저 처리하여 사람을 구하였으니 그 변화가 공중의 구름같이 어떻게 변할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고, 자신의 안위는 잊고서 험난함을 범하였으니 그 의(義)가 실로 추상(秋霜)보다 늠름하였다”라고 하였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평소에는 온화한 기운이 훈훈하여, 평민이나 천한 종들이라 하더라도 모두 은혜롭고 후덕하게 대우하였다. 그러나 대사(大事)에 임하고 대변(大變)에 처해서는 얼굴에 의로운 기색을 드러내고는 곧장 나아가 직접 담당하여 처리하였으니, 제아무리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같은 용맹이 있을지라도 능히 빼앗을 수 없는 점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권벌의 유고를 읽고서 “후덕(厚德)과 대절(大節)은 유림 학사들이 존모(尊慕)함을 그치지 않았고, 오래되어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후배들의 평가를 통해 우리는 그를 도덕군자, 절의군자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권벌의 문집인 『충재집(冲齋集)』은 모두 4차례의 간행 과정이 있었다. 초간본은 사후 120년 만인 1671년(현종 12)에 후손 권목(權霂)·권유(權濡) 등이 김추길(金秋吉)·남형회(南亨會) 등과 함께 삼계서원에서 2권 1책으로 간행하였다. 중간본은 5대손 권두경과 외손 이동완(李棟完)이 초간본에 빠진 시문을 추입(推入)하여 「습유(拾遺)」를 만들고, 부록을 증보·산삭하여 1705년(숙종 31)에 4권 2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삼간본은 후손 권빈(權薲)이 여러 종인과 함께 권만이 손수 편집한 「충재일기(冲齋日記)」를 대조·토론하여 1752년(영조 28)에 9권 5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사간본은 실록에서 발췌한 계사 24편 및 소(疏)·차(箚)·주의(奏議)와 사장(私藏)에서 얻은 영귀시(咏歸詩) 1편, 혹인서(或人書) 1편, 실록과 연보 등에서 새로운 사실을 종합하여 1930년 삼계서원에서 10권 6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 권두경, 『창설재집(蒼雪齋集)』
  • 권벌, 『충재집(冲齋集)』
  •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사전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