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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敬齋)

밀성박씨 국담공파 남강재密城朴氏 菊潭公派 南岡齋

39.0×68.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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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경재(敬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9.0×68.0
  • 건물명 경재(敬齋)
  • 공간명 밀성박씨 국담공파 남강재(密城朴氏 菊潭公派 南岡齋)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 산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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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敬齋)

경재(敬齋)



경재(敬齋)는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 1572~1652)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694년(숙종 20)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에 세운 남강서원(南岡書院) 동재(東齋)의 편액이다. 조임도(趙任道)가 지은 행장(行狀)에서 박수춘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박수춘은 특히 『소학(小學)』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일찍이 『소학』을 읽고 말하기를 “소자의 배움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고, 예로써 어른을 공경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니, 한결같이 효의 규범을 쫓는 것이다[甞讀小學曰 小子之學 無加於此 事親盡誠 敬長以禮 昏定晨省 一遵孝範]”라고 하였다. 박수춘이 언급한 ‘경(敬)’은 내면의 흔들림을 털어내는 수양 방법으로, 주자는 “마음에 하나의 편견도 없고 항상 경각 상태로 있으면서 어디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상태[主一無適]”라고 설명하였다. 마음이 욕심에 의해 무너지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사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무겁게 가라앉는 듯하다가도 신속하게 움직이고, 흐트러질 듯하면서도 끝내는 버텨내고 산만한 듯하지만 정제되어 있는 모습이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밀성박씨 국담공파 남강재(密城朴氏 菊潭公派 南岡齋) 소개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서북쪽에 있는 남산리는 소말과 남산, 낙성[가말] 등의 자연 마을이 합쳐진 마을이다. 소말은 인근 마을에 비해 작은 마을이다. 그래서 소(小) 마을, 작은 마을을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소리(小里) 또는 소촌(小村)이라고 적고 소말이라고 불러오고 있다. 남산이란 이름은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 1572~1652)이 이 마을에 살면서 마을 앞산이 비교적 높아서 앞산 또는 남산이라고 불렀던 것이 남산이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박수춘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남산에다 성을 쌓고 의병 활동을 하여 산 이름을 ‘성마루산성’이라고도 부른다.

경재(敬齋) 편액이 있는 남강서원(南岡書院)은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에 위치한 서원이다. 남강서원은 사림의 건의로 1694년(숙종 20) 국담 박수춘을 봉안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그 뒤 1717년(숙종 43)에 오졸재(迃拙齋) 박한주(朴漢柱, 1459~1504)를 함께 향사 지내게 되었으며,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가 1998년에 복원하였다. 높은 석축담장 중앙에 세운 3칸 규모의 솟을대문인 숭경문(崇敬門) 편액의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강당(마루 3칸, 온돌방 2칸)이 있다. 건물 보호를 위해 툇마루 앞에 유리문을 설치하였다. 양 측면에는 동재(東齋)인 경재(敬齋)와 서재(西齋)인 성재(誠齋)를 배치하였다. 강당 뒤 경사진 언덕 위에 3칸 맞배지붕 사당인 양현사(兩賢祠)가 별도의 영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데, 3칸 규모의 내삼문(內三門)에 절의문(節義門)을 편액하여 사당에 출입하게 하였다. 대문과 강당, 사당을 일축선상(一軸線上)에 두고 강당의 좌우에 동·서재를 둔 전학후묘형식(前學後廟形式)이다. 이곳에는 국담 박수춘의 유고집과 판간, 명고(明鼓)가 보존되어 있으며, 또한 조선 명현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친필 서장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남강서원복원상량문(南岡書院復元上樑文)」, 「강당상량문(講堂上樑文)」, 「남강서원복원기(南岡書院復元記)」가 있다. 서원 밖 광장에 ‘남강서원안내’, ‘남강서원복원헌성비’, 게시판에는 퇴계 이황 등의 유묵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서원 우측 관리사 앞에는 모경정(慕景亭) 정자가 별도로 세워져 있어 운치가 있다.

남강서원 앞에는 밀성박씨(密城朴氏) 국담공파(菊潭公派)의 남강재(南岡齋)가 있다. 남강재는 국담 박수춘을 배향하는 재사(齋舍)이다.

박수춘의 자는 경로(景老), 호는 국담(菊潭) 또는 숭정처사(崇禎處士), 본관은 밀양이며, 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 박신(朴愼)이다. 가학(家學)을 이어받았으며 『소학』을 항상 애독하였다. 1618년(광해 10)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 문제에 대하여 춘추대의(春秋大義)로써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창의(倡義)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켰으나, 화의(和議) 성립의 소식을 듣고 산중에 들어가 숭정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한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등과 이기설(理氣說)을 토론하는 등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1672년(현종 13)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에 추증되었고, 1694년(숙종 20) 남강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에는 『국담집(菊潭集)』을 비롯하여 『독서지남(讀書指南)』, 『학문유해(學問類解)』 등이 있다.

박한주의 본관은 밀성이며, 자는 천지(天支), 호는 오졸재(迃拙齋)이다. 고조부는 행산(杏山) 박세균(朴世均)이며, 아버지는 통사랑(通仕郞) 박돈인(朴敦仁)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제수된 뒤 한성부참군·사헌부감찰을 거쳐 1491년(성종 22) 사간원정언에 제수된 후 성균관전적을 지냈다. 1493년(성종 24) 부모 봉양을 위하여 창녕현감을 청하여 나가 백성들을 지성으로 보살피고 교화시켜 임금이 비단과 교서(敎書)로서 포상, 가자(加資)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종부시주부를 거쳐 1497년(연산 3)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이때 연산군의 실정(失政)과 무상시로 이어지는 유연(遊宴)을 중지할 것을 극간하자 연산군이 크게 노하였으나 피하지 아니하였으며 임사홍(任士洪) 등의 간악함을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1498년(연산 4) 무오사화에 김종직의 문도로 몰려 평안도 벽동으로 유배되었다. 1500년(연산 6) 전라도 낙안으로 이배되었는데 그곳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여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이때 임소에서 부친상을 당해 몇 번이나 혼절하였다가 소행하였다. 1504년(연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5월 15일 참형에 임하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향년 46세였다. 이후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고, 1517년(중종 12) 김정(金淨), 조광조(趙光祖) 등의 계(啓)에 의하여 도승지 겸 예문관직제학으로 추증되었다. 풍각면 차산리에 김응조가 찬한 ‘오졸재박한주여표비명(迃拙齋朴漢柱閭表碑銘)’이 세워져 있으며,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 함안 덕암서원(德巖書院), 청도의 석강서원(石岡書院) 및 차산서원(車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는 『오졸재집(迃拙齋集)』 등이 있으며, 밀양 5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참고문헌
  • 박수춘(朴壽春), 『국담집(菊潭集)』
  • 박한주(朴漢柱), 『오졸재집(迃拙齋集)』
  • 『안동의 문화유산』
  • 『안동의 지명유래』
  • 유교넷 http://www.ugyo.net/
  • 한국고전종합DB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