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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재(博約齋)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53.5×141.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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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박약재(博約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3.5×141.5
  • 건물명 박약재(博約齋)
  • 공간명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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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재(博約齋)

박약재(博約齋)



박약재(博約齋)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번지에 위치한 도산서원 동재(東齋)의 편액이다. 기숙사 기능을 한 이 동재는 상급생이 머물렀던 공간으로, 맞은편에 하급생이 기숙하던 서재(西齋)인 홍의재(弘毅齋)가 있다. 이 편액은 도산서원 운영위원회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41.5㎝, 세로 53.5㎝이다. ‘박약(博約)’은 『논어』 「옹야(雍也)」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단속한다면 또한 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또 『논어』 「자한(子罕)」에서 안연(顔淵)이 공자를 두고 말하기를, “부자(夫子)께서는 나를 문(文)으로 넓혀주고 예(禮)로써 요약하여주셨다[博我以文 約我以禮]”라고 하였다. 이는 학문을 널리 연구하여 사리를 탐구하고, 예법을 깍듯이 지켜 자기 몸을 단속하는 것을 말하는데, 박문과 약례는 각각 지식의 추구와 행동의 실천을 의미한다. 한편 학술단체인 박약회 안동지부의 창설이 1987년 7월 1일로 이곳 박약재에서 김호길, 권오봉 등 10여 명의 발기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1574년(선조 7)에 세워졌으나, 현재의 구성을 보면 이황이 생전에 건립한 도산서당과 이황 사후에 건립된 도산서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이 1561년(명종 16)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기와집으로, 서당을 건립하기 전에 학생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隴雲精舍)와 지원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를 먼저 건립한 것으로 여기까지가 도산서당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리고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인 1574년(선조 7)에 지은 것으로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 일종의 도서관의 성격인 좌우의 광명실(光明室), 학생들의 기숙사인 서재 박약재(博約齋)와 동재 홍의재(弘毅齋), 원장실과 강학공간인 중앙의 전교당(典敎堂), 퇴계와 제자 월천 조목을 배향하는 제사공간인 상덕사(尙德祠),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 서원에서 행해지는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 서원의 운영과 관리를 상시적으로 지원하는 인력이 거주하며 숙식을 제공하는 공간인 상고직사(上庫直舍)로 구성되었다.

글씨는 해서체로 되어 있는데, 손암(損菴) 조근(趙根, 1631~1690)의 「심도산서원일기(尋陶山書院日記)」에 의하면 전교당·한존재·상덕사·홍의재·진도문 편액과 함께 심인조(沈仁祚, 1556~1605)가 썼다는 설이 있으나 확언하기는 어렵다.

‘博’ 자의 윗부분을 살짝 작게 써서 선비의 몸가짐은 가볍고 공손해야 함을 말하는 것 같다. 예를 바탕으로 하는 규약은 엄정하여야 함을 보여주듯이 ‘約’ 자에는 근엄한 기운이 넘친다. 예리함과 둔중함을 고루 섞어 쓰면서도 단아함을 잃지 않은 ‘齋’ 자는 선비는 홀로 있을 때도 반드시 삼가야 함을 웅변하는 것 같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소개



1570년(선조 3)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이때부터 서서히 도산서원의 건립을 위한 과정이 이루어졌다. 1572년(선조 5) 지역 유림에서 사당을 지어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기로 결정하였는데, 1574년(선조 7)에야 사당을 짓고 강학소인 전교당(典敎堂)과 기숙사인 동재·서재를 완성하였다. 1575년(선조 8) 서원이 낙성되어 도산서원으로 사액되었는데, 전교당 정면에 걸린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 한석봉의 글씨이다. 1576년(선조 9) 서원이 공식적으로 완공되고 이황의 위패가 서원 사당인 상덕사(尙德祠)에 봉안되었으며, 이황에게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15년(광해 7)에는 월천 조목이 종향되었다. 1819년(순조 19) 도산서원 정문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동광명실(東光明室)이, 1930년 서쪽에 자리 잡은 서광명실(西光明室)이 완공되었다.

도산서원 전교당은 강학공간의 중심으로 앞면 4칸, 옆면 2칸의 규모이다. 서쪽의 앞면 1칸, 옆면 2칸은 방으로 원장이 기거하는 곳이며, 나머지 앞면 3칸, 옆면 2칸은 앞면이 트여 있는 마루방이다. 전교당은 넓은 석재 4단과 좁은 석재 1단 등 모두 5단으로 쌓은 대좌 위에 자리를 잡았다. 제2칸과 제3칸 앞의 석단 앞으로는 마당으로부터 오르는 7단의 계단을 나란히 두었다. ‘도산서원’ 현판이 달려 있는 방은 동쪽으로부터 제2칸 처마 밑이고, 도산서원 현판 뒤쪽으로는 마루방의 뒤쪽 끝에 ‘전교당’이라는 현판이 앞뒤로 줄을 맞추어 달려 있다. 전교당 아래 펼쳐져 있는 마당의 동서 양 끝으로는 전교당과 90도 각도로 서원의 학생들이 기숙하는 건물 2채가 벌려 서 있다. 동쪽 끝에 서 있는 건물은 박약재(博約齋)이고, 서쪽 끝에 서 있는 건물은 홍의재(弘毅齋)이다. 전교당에서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마당의 끝 지점에는 서원 영역으로 들어오는 진도문(進道門)이 있고, 진도문 좌우에 동광명실과 서광명실이다. 광명실은 책의 보관을 위해 건립된 누각식 건물이다. 경사면을 이용하여 지었으므로 밖에서 보면 누각이지만 안에서 보면 누각이 아니다.

한편 도산서원 맞은편 강 건너 석축 위에 비각이 있는데, 이것이 시사단(試士壇)이다. 이곳은 1792년(정조 16) 정조가 규장각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과시(科試)를 보인 곳이다. 정조의 제문으로 올리는 서원의 제향에는 7,228명의 선비가 참여하였다 하고, 과거 시험에 답안지를 낸 사람이 3,632명이었다고 한다. 정조는 그중에서 급제 2명, 진사 2명, 초시 7명을 뽑았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과제가 걸렸던 자리에는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웠으며, 비문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지었다. “도산(陶山) 물 양양(洋洋)히 흘러 그 위에 단(壇)이로다/ 단(壇)에 계급(階級)이 있고 물엔 연원(淵源)이 있나니/ 단(壇)에 오르고 물에 임(臨)함에 류(類)를 따라 뜻을 펴노니 /선생(先生)의 덕화(德化)요 임금님의 은혜이다.”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시사단이 물에 묻힐 처지가 되자 단을 더 올려 수면 위로 솟게 하여 오늘에 이른다.

참고문헌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