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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실(1)光明室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48.2×108.3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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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광명실(1)光明室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8.2×108.3
  • 건물명 광명실(1)光明室
  • 공간명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 서예가 이황((李滉, 1501~1571)
  • 위치정보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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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실(1)光明室

광명실(1)光明室



광명실(光明室)(1)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번지에 위치한 도산서원 장서고(藏書庫)인 동광명실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도산서원 운영위원회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08.3㎝, 세로 48.2㎝이다. ‘광명(光明)’은 주희(朱熹)의 「장서각서주자호명(藏書閣書厨字號銘)」의 “만 권의 서적이 나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준다[萬卷書籍 惠我光明]”라는 구절에서 취한 말이다. 이 건물은 1819년(순조 19)에 건립되었는데, 주로 왕의 내사 서적과 퇴계의 수택본 등을 보관하였다. 반면 서광명실은 1930년에 건립된 것으로 여기에는 국내 유학자의 문집 등 근래에 발간된 서적들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최근 양쪽 광명실에 있던 서적들을 전부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한 상태이다. 동광명실 뒤편에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증손(曾孫)인 이운(李芸, 1568~1638)의 사적(事蹟)에 대해서 기술한 「이주부공사적(李主簿公事蹟」이 걸려 있는데, 그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에 발을 들인 왜적들은 거치는 곳마다 닥치는 대로 건물을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서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국가적 대위기의 상황에서 이운은 도산서원의 서적과 위패 봉안의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아버지 이응호(李應虎)에게 “소자가 서원의 중임을 맡았으니 우리 퇴계 선생의 상덕사(尙德祠)를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고, 아버지 이응호는 “내가 훌륭한 자식을 두었다”라고 하였다. 아버지의 승낙을 얻은 이운은 도산서원의 서적과 제기를 취하여 땅에 묻고는 위판을 받들어 청량산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순흥의 소수서원으로 옮겼다. 이때 봉안하는 곳마다 향불을 피우고 경건히 절을 올리는 의식을 빠트리지 않았다. 난이 안정되자 그는 위판을 다시 도산서원에 봉안하였고 묻어놓은 서적들은 무탈하게 되었다. 그는 또 기해년(1599)에 『퇴계문집』을 간행함에 있어 감독의 역할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글씨는 퇴계 이황의 친필인 해서체로 알려져 있다. 퇴계 사후에 지어진 광명실이 어떻게 퇴계의 글씨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 간단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광명실은 원래 퇴계에 의해 건립된 역동서원(易東書院) 장서각(藏書閣)으로 퇴계 이황이 직접 명칭을 정하고 글씨도 썼던 것이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역동서원이 훼철되자 그곳의 광명실 편액을 도산서원으로 옮겨와서 이곳에 게액(揭額)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 역동서원에 있던 서책과 편액이 도산서원으로 이관되었다. 1819년(순조 19) 건립 당시에 이 글씨를 모각하여 게판하였다.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소개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1574년(선조 7)에 세워졌으나, 현재의 구성을 보면 이황이 생전에 건립한 도산서당과 이황 사후에 건립된 도산서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이 1561년(명종 16)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기와집으로, 서당을 건립하기 전에 학생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隴雲精舍)와 지원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를 먼저 건립한 것으로 여기까지가 도산서당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리고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인 1574년(선조 7)에 지은 것으로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 일종의 도서관의 성격인 좌우의 광명실(光明室), 학생들의 기숙사인 서재 박약재(博約齋)와 동재 홍의재(弘毅齋), 원장실과 강학공간인 중앙의 전교당(典敎堂), 퇴계와 제자 월천 조목을 배향하는 제사공간인 상덕사(尙德祠),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 서원에서 행해지는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 서원의 운영과 관리를 상시적으로 지원하는 인력이 거주하며 숙식을 제공하는 공간인 상고직사(上庫直舍)로 구성되었다.

1570년(선조 3)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이때부터 서서히 도산서원의 건립을 위한 과정이 이루어졌다. 1572년(선조 5) 지역 유림에서 사당을 지어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기로 결정하였는데, 1574년(선조 7)에야 사당을 짓고 강학소인 전교당과 기숙사인 동재·서재를 완성하였다. 1575년(선조 8) 서원이 낙성(落成)되어 도산서원으로 사액되었는데, 전교당 정면에 걸린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 한석봉의 글씨이다. 1576년(선조 9) 서원이 공식적으로 완공되고 이황의 위패가 서원 사당인 상덕사에 봉안되었으며, 이황에게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15년(광해 7)에는 월천 조목이 종향되었다.

도산서원 전교당은 강학공간의 중심으로 앞면 4칸, 옆면 2칸의 규모이다. 서쪽의 앞면 1칸, 옆면 2칸은 방으로 원장이 기거하는 곳이며, 나머지 앞면 3칸, 옆면 2칸은 앞면이 트여 있는 마루방이다. 전교당은 넓은 석재 4단과 좁은 석재 1단 등 모두 5단으로 쌓은 대좌 위에 자리를 잡았다. 제2칸과 제3칸 앞의 석단 앞으로는 마당으로부터 오르는 7단의 계단을 나란히 두었다. ‘도산서원’ 현판이 달려 있는 방은 동쪽으로부터 제2칸 처마 밑이고, 도산서원 현판 뒤쪽으로는 마루방의 뒤쪽 끝에 ‘전교당’이라는 현판이 앞뒤로 줄을 맞추어 달려 있다. 전교당 아래 펼쳐져 있는 마당의 동서 양 끝으로는 전교당과 90도 각도로 서원의 학생들이 기숙하는 건물 2채가 벌려 서 있다. 동쪽 끝에 서 있는 건물은 박약재이고, 서쪽 끝에 서 있는 건물은 홍의재이다. 전교당에서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마당의 끝 지점에는 서원 영역으로 들어오는 진도문이 있고, 진도문 좌우에 동광명실과 서광명실이다. 광명실은 책의 보관을 위해 건립된 누각식 건물이다. 경사면을 이용하여 지었으므로 밖에서 보면 누각이지만 안에서 보면 누각이 아니다.

한편 도산서원 맞은편 강 건너 석축 위에 비각이 있는데, 이것이 시사단(試士壇)이다. 이곳은 1792년(정조 16) 정조가 규장각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과시(科試)를 보인 곳이다. 정조의 제문으로 올리는 서원의 제향에는 7,228명의 선비가 참여하였다 하고, 과거 시험에 답안지를 낸 사람이 3,632명이었다고 한다. 정조는 그중에서 급제 2명, 진사 2명, 초시 7명을 뽑았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과제가 걸렸던 자리에는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웠으며, 비문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지었다. “도산(陶山) 물 양양(洋洋)히 흘러 그 위에 단(壇)이로다/ 단(壇)에 계급(階級)이 있고 물엔 연원(淵源)이 있나니/ 단(壇)에 오르고 물에 임(臨)함에 류(類)를 따라 뜻을 펴노니 /선생(先生)의 덕화(德化)요 임금님의 은혜이다.”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시사단이 물에 묻힐 처지가 되자 단을 더 올려 수면 위로 솟게 하여 오늘에 이른다.

참고문헌
  • 정사성, 『지헌선생연보(芝軒先生年譜)』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