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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현사(啓賢祠)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46.5×98.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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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계현사(啓賢祠)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6.5×98.0
  • 건물명 계현사(啓賢祠)
  • 공간명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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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현사(啓賢祠)

계현사(啓賢祠)



계현사(啓賢祠)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있었던 청계서원(淸溪書院)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도산서원 운영위원회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98㎝, 세로 46.5㎝이다. 청계서원은 1667년(현종 8)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의 아버지인 이식(李埴, 1463~1502)과 이황의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 1469∼1517), 그리고 중형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온계연보』에 의하면 청계서원은 예안현 북쪽 15리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계현(啓賢)’은 ‘현인(賢人)을 계시(啓示)한다’는 의미로, 여기에서의 현인은 앞에서 말한 이식, 이우, 이해이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묵직한 붓놀림이 돋보인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소개



이식(李埴, 1463~1502)의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기지(器之)이다. 노송정(老松亭)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의 장남이자 퇴계 이황의 부친으로, 장인 김한철(金漢哲)의 수많은 장서(藏書)를 물려받아 젊어서부터 학문에 매진하였다. 1501년(연산 7)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병으로 졸하였다. 뒤에 아들 이황으로 인하여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증직되었고, 청계서원(淸溪書院) 계현사(啓賢祠)에 제향되었다.

이우(李堣, 1469∼1517)의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재(松齋)이다. 퇴계 이황의 숙부로, 1492년(성종 23)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498년(연산 4) 3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임용되고 이어 예문관검열, 예문관대교, 예문관봉교를 거쳤다. 1501년(연산 7) 성균관전적에 올라 사간원정언에까지 올랐다. 사간원정언 재임 중 온갖 화란을 빚어내는 간사한 무리를 탄핵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논계(論啓)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1504년(연산 10) 사간원헌납에 복직해서 다시 임숭재(任崇載) 등에 대해 벼슬자리가 합당치 못하다고 논계하고 또 불교를 배척하는 논계를 올려 연산군의 분노를 사기도 하였다. 1506년(연산 12)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와 춘추관수찬관을 겸하였다가 마침 입직하던 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협력하여 그 공로로 정국공신4등에 녹훈되고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지며 우부승지로 벼슬이 승진되어 경연참찬관을 겸하였다. 1512년(중종 7) 정월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조카인 이황에게 『논어(論語)』를 가르쳤다. 이 무렵 영해부사와 김해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에서 자질(子姪)을 가르치며 독서와 저술에 잠심하였다. 1514년(중종 9),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날 밤에 불미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동료 승지들과 함께 대간의 탄핵을 받아 훈적(勳籍)이 삭탈되었다. 하지만 이우는 청해군에 봉해졌을 때부터 번번이 관직을 사양했기에 훈적이 삭탈된 것을 잘된 일로 여겼다. 다만 임금을 속이고 구차한 처신을 했다는 누명이 께름칙하여 자신을 해명하는 「자명소(自明疏)」를 올렸다. 훗날 사관들은 이우가 폐주 연산군에 대해서도 도리를 다했고 새 임금 중종을 영립(迎立)하는데도 일익을 담당했다고 평가하였다. 이듬해 안동부사에 부임되어 목민(牧民)의 본보기로서 칭송이 높았으며, 밝은 정사로 가선대부의 직첩을 돌려받았으나 같은 해 겨울 병으로 관아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49세였다. 조야가 못내 애석히 여겼으며 나라에서는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이해(李瀣, 1496∼1550)는 본관이 진성(眞城), 자가 경명(景明), 호가 온계(溫溪), 시호가 정민(貞敏)이다. 어려서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에게 글을 배워 1525년(중종 20)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528년(중종 23) 문과에 급제하였다. 1533년(중종 28) 사간원사간·정언 등을 거쳐 1541년(중종 36) 경상도 진휼경차관·좌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탁용(擢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少尹)이 득세하자 이기의 심복인 사간(司諫)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이때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 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나, 귀양 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의 삼봉서원, 예안의 청계서원에 제향되었다.

학사 김응조가 1667년(헌종 8)에 지은 「청계서원 계현사 봉안문(淸溪書院啓賢祠奉安文)」이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孔闡聖敎 공자가 성교를 천명하고

朱明正學 주자가 정학을 밝히시어

萬世太平 오랫동안 태평하고

文物禮樂 문물과 예악이 정립되었네

推原毓慶 근원을 미루어 자손이 태어났으니

合有報酭 제사 받드는 것이 합당하고

啓聖啓賢 성인과 현인을 열어주었기에

廟焉薦豆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네

惟我東方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聖路長湮 성인의 길이 영구히 막히어

章句而狃 장구로만 친압하여

煦煦爲仁 작은 온정을 인으로 여겼네

恭惟贊成 삼가 생각건대 찬성공은

夙稟異質 일찍부터 품성이 남달라

善積於躬 착한 일을 몸소 쌓아

餘慶乃發 남은 경사 발하셨네

陶山講道 도산에서 강도하시니

四方雲趨 사방에서 운집하였으며

人文載煥 인문이 비로소 환해지고

日月昏衢 어두운 거리에 해와 달이 걸렸네

韋齋家法 위재의 훌륭한 가법이

考亭是付 고정에게 이어져서

功深啓開 계도하신 깊은 공이

寔賴垂裕 이에 후대에 드리워졌네

士論僉同 사론이 모두 함께하여

新廟有侐 새로이 사당을 지어 제향하네

縟儀將擧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려고

吉日載卜 좋은 날을 점치었네

念惟參判 생각건대 참판공은

英才令德 빼어난 재주와 훌륭한 덕을 지녀

金昆玉友 금옥같이 훌륭한 형제가

互相資益 서로 도움을 주었네

矧伊大憲 게다가 이 대사헌은

尙有典刑 오히려 전형을 지녀

行著鄕邦 행실이 고을에 드러났고

望重明廷 명망이 조정에 두터웠네

聯芳襲美 형제의 아름다운 자취 이어져

萃于一家 한 집안에 모이었기에

爰配左右 이에 좌우에 배식하고

樽勺淨嘉 맑은 술을 올리네

吾東盛禮 우리나라의 성대한 예는

敻越千古 오랫동안 이어져 와서

桑梓增輝 고향이 더욱 빛을 발하고

溪山改覩 계산이 새 모습으로 바뀌었네

先師有知 선사께서 아시거든

庶慰在天 하늘에서 위로해 주십시오

報祀無怠 제사를 게을리하지 않고

於千萬年 천만 년 이어지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上)』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