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현사(鄕賢祠)
향현사(鄕賢祠)는 예안현 관아(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에서 1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향사당(鄕射堂)에 있었던 사당의 편액이다. 향현사의 위치에 대한 기록은 예안의 읍지인 『선성지(宣城誌)』에 기록되어 있다. 이 편액은 도산서원 운영위원회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12㎝, 세로 41㎝이다. ‘향현(鄕賢)’은 그 고을의 어질고 덕망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향사당은 조선시대에 고을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봄과 가을 두 차례 모임을 갖고 활쏘기와 함께 주연을 베풀며 고을의 당면 과제를 의논하거나 민심의 동향을 살피던 곳이다. 1475년(성종 6) 유향소가 다시 설립될 때 중국 주(周)나라의 제도를 따라 풍속을 교화하되, 특히 예악과 덕행을 세우는 데 제일인 ‘향사음례(鄕射飮禮)를 행하는 유향소’라는 뜻으로 향사당(鄕射堂)으로 개칭하였다. 향사당의 임원으로는 좌수 1인과 별감 3인이 있었다. 이러한 향사당에 지방에서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난 분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향현사(鄕賢祠)를 건립하였다. 건립 장소는 관아와 인접한 곳에 위치하였다. 예안지역은 1920년경 안동과 합쳐지기 이전에는 행정구역이 다르고 문화와 기능도 모두 달랐다. 그리하여 예안현 관아 인근에 향사당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향사당 건립의 구체적 시점을 알 수 없으나,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위패도 1702년(숙종 28) 분강서원(汾江書院)이 건립되어 그곳으로 옮겨서 봉안하기 전까지는 향사당에 배향되어 있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소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1556년(숙종 28)에 ‘향사당 약조(鄕射堂約條)’를 세우면서 향사당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범에 대해 조목조목 명시하였고, 이를 어길 시에 처벌을 받게 되는 구체적인 항목도 자세하게 명시하였다. 퇴계가 지은 서문(序文)의 일부분을 옮겨보기로 한다.옛날 향대부(鄕大夫)의 직책은 덕행과 도예(道藝)로써 백성을 인도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형벌로써 규탄한다. 선비 된 자는 또한 반드시 집에서 닦아 고을에서 드러난 후라야 나라에 등용되니, 이와 같음은 어째서인가?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은 인도(人道)의 큰 근본이요, 집과 향당(鄕黨)은 실로 그것을 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선왕(先王)의 가르침은 이것(효제충신)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 법을 세우기를 이렇게 하였다. 후세에 이르러 법제(法制)는 비록 폐하였으나,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는 진실로 그대로 있으니, 어찌 고금(古今)의 마땅함을 참작해서 권하고 징계하지 아니하겠는가. 지금의 유향소(留鄕所)는 바로 옛날 향대부가 끼친 제도이다. 알맞은 사람을 얻으면 한 고을이 화평해지고, 알맞은 사람이 아니면 온 고을이 해체(解體)된다. 더욱이 시골은 왕의 교화가 멀어서 좋아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공격하고, 강하고 약한 자들이 서로 알력을 벌이고 있으니 혹시라도 효제충신의 도가 저지되어 행해지지 못하면 예의(禮義)를 버리고 염치가 없어지는 것이 날로 심해져서 점점 이적(夷狄)이나 금수(禽獸)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니, 이것이 실로 왕정(王政)의 큰 걱정인데, 그 규탄하고 바로잡는 책임이 이제는 유향소로 돌아오니, 아아, 그 또한 중하다.우리 고을은 비록 땅은 작으나 본래 문헌(文獻)의 고을로 이름이 났고 유현(儒賢)이 많이 나서, 왕조(王朝)에 빛나는 자가 대대로 자취를 잇대었으므로 보고 느끼고 배우고 본떠서 고을의 풍속이 매우 아름답더니, 근년에는 운수가 좋지 못하여서 덕이 높아 존경받는 공(公)들이 서로 잇달아 돌아갔다. 그러나 오히려 오래된 집 안에 남아 전하는 법도가 있어 문의(文義)가 높고 성하니, 이를 서로 따라서 착한 나라가 되는 것이 어찌 불가(不可)하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인심이 고르지 않고 습속이 점점 그릇되어 맑은 향기는 드물게 풍기고 나쁜 싹이 그 사이에서 돋아나니, 지금 막지 않으면 그 끝이 장차 이르지 않을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숭정대부(崇政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이 이러함을 근심하여 일찍이 약조를 세워서 풍속이 정중하게 되도록 노력하였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는데, 지금 지사(知事)의 여러 아들이 방금 경내(境內)에서 거상(居喪)하고 나 역시 병으로 전원(田園)에 돌아와 있는데, 고을 어른들이 다 우리 몇 사람으로 하여금 속히 선생의 뜻을 이룩하라고 책임 지우는 것이 매우 지극하였다. 사양했으나 되지 않아 이에 서로 함께 의논하여, 그 대강만 들어서 이같이 하고, 다시 고을 사람에게 두루 보여 가부(可否)를 살핀 뒤에 정하였으니, 영원(永遠)토록 행하여도 폐단이 없을 것이다. (중략) 이제부터 우리 고을의 모든 선비들이 성명(性命)의 이(理)를 근본으로 하고 국가의 가르침을 따라서 집에 있을 때나 고을에 있을 때나 각기 인륜의 법칙을 다하면, 곧 이것은 나라의 좋은 선비가 되어서 혹은 궁하거나 달하거나 서로 힘입을 것이니, 별도로 조항을 세워서 권면할 것을 기필하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또한 형벌을 쓸 바가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이같이 함을 알지 못하고 예의(禮義)를 침범하여 우리 고을의 풍속을 허물면, 이는 곧 하늘이 버린 백성이니 비록 형벌을 없게 하고자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 점이 오늘 약조를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가정 병진년(1556, 명종 11) 12월에 고을 사람 이황이 서문을 쓰다.퇴계 이황은 ‘향사당 약조’를 세우게 된 구체적인 배경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지역의 선배인 농암 이현보 또한 약조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운명하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참고문헌- 권시중, 『선성지』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