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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재(講誼齋)

단양우씨 종친회丹陽禹氏 宗親會

30.0×50.6 / 행서(行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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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강의재(講誼齋)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30.0×50.6
  • 건물명 강의재(講誼齋)
  • 공간명 단양우씨 종친회(丹陽禹氏 宗親會)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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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재(講誼齋)

강의재(講誼齋)



강의재(講誼齋)는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2~1342)의 묘제를 받들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에 건립한 재사의 편액이다. ‘강의(講誼)’는 ‘강의(講義)’와 같은 뜻으로, 경전의 뜻을 함께 토론한다는 의미이다.

글씨는 필봉이 많이 드러나 조금은 어지러운 듯하지만 자형이 조화로운 작자 미상의 행서체이다. 붓끋을 예리하게 세워 속도감 있게 쓴 글씨다. 많이 노출된 필봉(筆鋒)으로 인해 조금은 거칠어 보이지만 ‘講’ 자에서의 미세한 횡획의 각도 변화와 ‘誼’ 자에서 빠른 초서의 결구로 시작하여 우측 부분을 살짝 기울여 쓰고, ‘齋’ 자를 가늘고 꼿꼿한 선으로 꾹꾹 눌러 써서, 강약(强弱)과 비수(肥瘦), 완급(緩急), 곡직(曲直)을 적절히 섞어 조화를 이룬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단양우씨 종친회(丹陽禹氏 宗親會) 소개



여말의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2~1342)이 만년에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선양리에 은거한 이래로 그 후손들은 예안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대대로 살아왔다. 예안면은 고구려 때 매곡현이었고, 신라 때는 선곡현으로 내령군의 영현(領縣)이었다. 고려시대 1018년(현종 9) 길주에 복속되어 예안현이 되었고, 1376년(우왕 2) 다시 군으로 승격했다가 얼마 뒤에 주(州)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 예안현이 되었고, 1895년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예안군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동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와 통합되면서 안동시 예안면이 되었다. 그리고 서부, 남부, 북부의 저지대는 안동호가 차지하며, 북쪽의 동계천과 남쪽의 구계천이 서쪽 경계를 흐르는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북쪽으로 두리봉, 서쪽으로 운남산, 남쪽으로 옥녀봉 등이 솟아 있다.

단양우씨 예안파는 고려 전기에 정조호장을 지내고 문하시중평장사에 추증된 우현(禹玄)의 후손이다. 우현은 고려 광종 때 고려로 망명하여 단양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 고려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 장군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우신(禹臣)은 문전법령을 지냈으며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우인가(禹仁可)는 양주목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우잉순(禹仍順)은 관찰사를 지냈는데, 역동 우탁의 고조부이다. 역동 우탁의 증조부인 우경절(禹慶節)은 지도사를, 조부 우중대(禹仲大)는 문하시중을, 부친 우천규(禹天珪) 역시 문하시중을 지냈다. 이렇듯 단양우씨는 시조인 우현 이래로 사환이 끊어지지 않은 명문거족이다.

역동 우탁은 자가 천장(天章)·탁부(倬夫), 호가 단암(丹岩)·백운당(白雲堂)이며 세칭 ‘역동 선생(易東先生)’이라 부른다. 본관은 단양이며, 부친은 천규(天珪)이고,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에게 수학하였다. 1262년(원종 3)에 단산현 품달리 신원(현재의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서 태어났다. 1278년(충렬왕 16)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향공진사에 선발되었고, 곧 발탁되어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다. 그 뒤 1290년(충렬왕 16)에 정가신(鄭可臣)이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하였다. 이듬해 영해사록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영해의 백성들이 팔령(八鈴)이라는 괴이한 신사에 현혹되어 많은 폐해가 발생되고 있었다. 이에 우탁은 괴이한 신사를 부수어 바다에 던져버림으로써 음사(淫祠)를 끊어버렸다. 그 뒤 아홉 개 군의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계속해서 요괴 숭배를 엄금하고 괴이한 신사를 불태워버림으로써 미신을 타파하고 음예한 풍속을 개혁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특히, 지나친 불사(佛事)의 폐단과 승려의 타락에도 제재를 가하였으며, 사찰의 지나친 건립과 시주를 금지하는 등 억불정책에도 앞장섰다.

이후 벼슬이 올라 시정을 논하고 백관을 감찰 탄핵하며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감찰규정에 임명되었다. 이때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를 범간하는 패륜을 자행하였다. 이에 감찰규정이었던 역동 우탁은 이튿날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을 때는 목을 쳐도 좋다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그 뒤 진현관직제학을 거쳐, 성균관좨주에 임명되었다. 이때 관학의 확립을 의논했으며, 성균관 유생들에게 정주의 성리학을 강론하여 고려 말기에 새로운 학풍으로서의 신유학 진흥에 매우 힘썼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인륜의 강상이 무너지고 사회질서가 해이했으며, 특히 충렬왕 대에는 원과의 예속적 관계에서 그 폐단이 우리의 의복 등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역동 우탁은 정주의 의리학적 학문을 바탕으로 천도의 인륜을 밝히고, 사회적 폐풍을 개혁하고자 여러 차례 소를 올렸다. 역동의 상소가 가납되어 전부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1308년(충선왕 1) 11월에 양반의 종친들은 외종, 이종 형제간의 근친혼을 금한다는 충선왕의 교지가 반포되는 등 오랑캐 풍습이 점차 미풍양속으로 변하게 되었다.

벼슬에 뜻이 없었던 우탁은 당시의 상황에서 정도를 구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벼슬에서 물러나 안동시 예안면 선양리에 은거하였다. 이후 충숙왕이 그의 충의를 높이 평가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가, 1342년(충혜왕 3) 2월 7일에 81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도학과 문행이 뛰어나 ‘문희공(文僖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한편, 정정재사(鼎井齋舍)는 역동 우탁의 묘소를 수호하고 묘사를 받들기 위해 마련된 재사이다. 안동시 와룡면 주진교를 건너 삼산을 지나 고갯마루를 오르면 윗솥우물마을이 있고, 이곳에 정정재사가 도로의 남측에 남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정정재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앙에 6칸의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각각 2칸의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사고석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주 건물인 ‘정정재(講誼齋)’를 가운데 두고, 그 앞쪽에 ‘영모실(永慕室)’과 ‘강의실(講誼室)’을 동서로 마주 보게 하여 마치 서원 건축에서 강당을 중심으로 동·서재를 좌우에 둔 것과 같은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전면의 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솟을대문이다. 재사 우측 뒤편 산록에는 역동 우탁 선생의 묘소가 있다.

참고문헌
  • 『안동의 현판(上)』, 안동민속박물관, 2004
  • 『易東先生의 思想과 易東書院의 歷史』, 안동문화연구소, 1992
  •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