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서체별 보기

명성재(明誠齋)

능성구씨 백담문중綾城具氏 柏潭門中

54.0×126.0 / 해서(楷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명성재(明誠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4.0×126.0
  • 건물명 명성재(明誠齋)
  • 공간명 능성구씨 백담문중(綾城具氏 柏潭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 140-2
  •  
r0209_1.jpg
명성재(明誠齋)

명성재(明誠齋)



명성재(明誠齋)는 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계리(周溪里)에 건립한 주계서원(周溪書院)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명성(明誠)’은 선비가 현인의 경지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명’과 ‘성’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재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주자는 성을 밝게 한 이후에 선을 성실하게 할 수 있는 자는 현인이며, 이는 교(敎)를 말미암는다고 하였다. 『중용』 21장의 “성(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짐[明]을 성(性)이라 하며, 명(明)으로 하여 성(誠)해짐을 교(敎)라 한다. 성(誠)하면 밝아지고 밝으면 성(誠)해진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는 말에서 취하였다.

글씨는 붓에 먹을 듬뿍 찍어 중후한 기필(起筆)로 시작하여 필획에 압력과 속도 변화를 주며 윤갈(潤渴)이 함께 어울려 시원함을 준다. 왼쪽의 내리긋는 획을 가볍게 처리함과 ‘言’의 점과 중첩된 가로획의 각도와 장단 변화 등이 적절히 섞인 비백(飛白)이 조화롭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능성구씨 백담문중(綾城具氏 柏潭門中) 소개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는 구존유(具存裕)이다. 구존유는 고려조에서 벽상삼한삼중대광검교상장군의 벼슬을 지냈으며, 전라남도 능성에 은거하던 신안주씨(新安朱氏)의 시조인 주잠(朱潛, 1194~1260)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능성구씨의 문호를 열었다. 이후 7세손 구홍(具鴻)에 이르러 파가 갈리고 크게 번성하였다. 구홍은 고려 우왕 때 좌정승을 지냈으며,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두문동(杜門洞) 72현 중 한 사람이다. 능성구씨가 안동에 정착하게 된 것은 구홍의 손자 구익명(具益命)에 의해서다. 구익명은 형조좌랑 정약(鄭若)의 사위가 되어 충청도 면천에서 안동 와룡면 지내리로 이거하였다. 구익명이 안동으로 이거한 뒤 자손들은 대대로 안동권씨와 혼반을 맺으면서 안동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의 아들 구인서(具仁恕)는 훈련원참군을 지냈는데, 이때 왕을 모시고 사냥터에 나갔다가 도리에 어긋나는 명령을 차마 시행할 수 없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후 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 되고, 과거에 급제하여 현달하면서 능성구씨 백담문중은 안동의 명문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구봉령은 자가 경서(景瑞), 호가 백담(栢潭), 본관은 능성(綾城),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1526년(중종 21) 5월 8일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에서 구겸(具謙)과 권회(權檜)의 딸인 안동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532년(종종 27) 7세에 어머니가, 11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서 조모 안동권씨의 손에서 성장하였다. 이때 외종조부 권팽로(權彭老)를 찾아가 수학하고, 14세에는 삼가현감 정이흥(鄭以興)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0세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 되었다. 1560년(명종 15)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그해 12월에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으며, 주위로부터 “삼대(三代)의 인물이고 양한(兩漢)의 문장이다”라는 평을 받았다. 1562년(명종 17)에 대교와 봉교를 거쳐 홍문관정자에 제수되었다. 이때 차자를 올려 윤원형(尹元衡)의 정치적 폐단을 포함한 시정의 폐단을 직간했는데, 문장이 시기(時忌)에 저촉되는 것이어서 동료들이 모두 놀랐다. 1564년(명종 19) 6월에 정시에서 장원하여 승훈랑이 되고 전적으로 승진했다가 다시 호조좌랑이 되었다. 이해에 황해도에 황충이 발생하여 왕명을 받들고 재난을 살폈다. 1568년(선조 1) 4월 어머니 기일에 치재(致齋)를 위해 규칙대로 휴가를 올렸다. 마침 관청에 낭료(郞僚)는 없었고 정랑(正郎) 한 명만 있었는데, 그 사람이 전례(典例)에 따라 생기(省記)를 들이지 않은 일이 발단이 되어 담당 관리로서 파직을 당하였다. 두 달 만에 복직되었지만, 이후 구봉령은 조정과 고향을 오가며 삶을 이어갔다. 1573년(선조 6) 8월에 대사성이 되었다. 성균관의 무너진 기강을 확립하고 학규를 새롭게 하여 하료들에게는 직분을 다하도록 권장하고, 유생들을 예법으로 인도하여 사학(四學)의 규모를 일신시켰다. 1576년(선조 9)에 와룡산 아래에 용산서당(龍山書堂)을 완성하고 권춘란(權春蘭), 정사성(鄭士誠), 정사신(鄭士信), 권우(權宇) 등과 의리지학을 강론하였다. 이후 1583년(선조 16) 4월에 형조참판, 5월에 전라도관찰사, 1584년(선조 17)에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당시 동서 분당으로 인해 조정이 매우 시끄러웠는데, 구봉령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처신하였다. 주장은 공평하고 정당하여 조금의 사심도 없었고, 인재를 추천할 때는 동인과 서인을 따지지 않고 오직 적임자를 추천할 뿐이었다. 1586년(선조 19) 7월 2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1세였다. 10월에 안동부 동쪽 안문산에 장사지냈다. 『선조수정실록』에 백담 구봉령의 졸기가 실려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황은 그를 문학과 덕행이 있다고 칭찬하여 매우 중하게 여겼다. 성품이 충후하고 순근하여 모나거나 기이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삼대(三代)의 인물이요 양한(兩漢)의 문장이며, 대관(臺館)의 직에서는 강직하였고, 방백이 되어서는 명성과 치적이 또한 현저하였다. 사론이 분열될 때에도 중립을 지켜 한쪽으로 쏠리지 않았으며, 당인(黨人)으로 지목을 받게 되자 관직에 제수되어도 일절 부임하지 않았다.

한편 백담 구봉령은 1546년(명종 1) 9월에 안동 와룡산에 있는 선부군 묘소 아래에 ‘동강서당(東岡書堂)’을 지은 뒤 이곳에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이후 구봉령은 1576년(선조 9)에 동강서당을 확대하여 와룡산 아래에 강당과 동·서재 및 전루를 갖춘 ‘용산서당(龍山書堂)’을 건립하여 사우들과 의리지학을 강론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백담 구봉령 사후 1612년(광해 4)에 사림의 공의로 서당 뒤에 사당을 지어 위판을 봉안하고 용산서당을 ‘용산서원(龍山書院)’으로 승격시켰다. 그 뒤 1693년(숙종 19)에 ‘주계(周溪)’로 사액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 주계리로 이건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설되지 못하였다. 2009년 백담 구봉령의 후손들의 모임인 송백회(松柏會)에서 주도하여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에 ‘동강서당’을 중창하였다.

안동 시내에서 북쪽으로 도산서원을 향하다가 와룡면사무소 앞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2㎞ 정도 올라가면 도로 옆 산기슭에 ‘동강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서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옥 1채가 당당하게 서 있다. 팔작지붕에 5칸 규모인데, 중앙의 3칸은 대청이고 양쪽 칸은 방이다. 오른쪽 방에는 백담 구봉령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데, 와룡면 지내리 사당에서 모셔온 것이다. 동강서당 왼쪽에는 백담종택이 있는데, 전통 한옥이 아닌 일반 주택이다. 종택은 본래 사당이 있는 건너편 지내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참고문헌
  • 구봉령 지음, 장재호·김우동 옮김, 『(국역)백담집』, 한국국학진흥원, 2015
  • 박동일, 「柏潭 具鳳齡의 한시 연구」,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 『선조수정실록』
  • 『한국의 편액2』,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