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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정(老松亭)

진성이씨 노송정종택(眞城李氏 老松亭宗宅)

52.5x80.0x5.6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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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노송정(老松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2.5x80.0x5.6
  • 건물명 노송정(老松亭)
  • 공간명 진성이씨 노송정종택(眞城李氏 老松亭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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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송정(老松亭)

노송정(老松亭)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퇴계태실’로도 불리는 노송정(老松亭)은 퇴계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이 1454년(단종 2)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건립한 종택이다. 이계양은 부친 이정(李禎)이 영변판관을 마치고 귀향할 때 가져온 뚝향나무 세 그루 가운데 한 그루를 받아 종택에 심고 키우며 노송정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더불어 자신의 호로 삼았다.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의 「노송정기老松亭記」에 따르면 이계양은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디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한 ‘세한의 절개와 지조’를 ‘노송’에 비유하며 구차하게 태양만을 향해 피는 꽃나무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는 세조에 의해 쫓겨난 단종에 대한 절개와 지조이다.

편액의 글씨는 단정하고 반듯하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서생의 모습, 어딘지 지나친 조바심이랄까 조심스러움이 주변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글씨에 비해 편액의 공간이 크다. 그래서 남은 공간이 많고 그것이 더 위축되게 한다. 그러나 주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꼿꼿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진성이씨 노송정종택(眞城李氏 老松亭宗宅) 소개


노송정종택 문중은 진성이씨(眞城李氏)의 시조 이석(李碩)의 후손이다. 이석은 대대로 경상도 진보현(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에 살았던 향리로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죽은 뒤 밀직부사로 임명되었으며, 이자수(李子脩)와 이자방(李子芳) 두 아들을 두었다. 이석의 맏아들 이자수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통헌대부 판전의시사에 이르렀고 1363년(공민왕 12) 개경을 침략한 홍건적을 격퇴한 공로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이후 왜구의 침략을 피해 진보에서 안동 마애로 옮겼다가 만년에 다시 지금의 예안 두루(주촌 周村)로 오면서 두루마을 입향조가 되었다.

이자수의 손자 이정(李禎)은 뛰어난 무예로 세종 때 북방의 오랑캐를 격퇴하여 변경 지방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건주위 추장 이만주(李萬住)가 변경을 위협하자, 이자수는 영변판관에 발탁되어 부사 조비형(曺備衡)을 도와 약산성(藥山城)을 축조하여 영변에 거진(巨鎭)을 설치하는 데 공적을 남겼고, 또 최윤덕(崔潤德)을 따라 모련위를 정벌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선산부사로 재직할 때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명망을 얻었다. 나아가 여섯 명의 딸을 남백경(南伯庚)·유봉수(柳鳳壽)·정보문(鄭普文)·이주(李疇)·박근손(朴謹孫)·권종(權悰)에게 출가시켜 폭넓은 혼맥을 형성함으로써 가문이 향촌사회에서 재지적 기반을 튼튼하게 하는데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정은 이우양(李遇陽)·이흥양(李興陽)·이계양(李繼陽, 1424~1488)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이우양은 무과에 급제하여 인동현감을 역임하였으며 그대로 예안 두루에 살면서 진성이씨 주촌파를 형성하였고, 그의 후손들 역시 두루를 무대로 가문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둘째 이흥양은 증조부 이자수가 진보에서 처음 이거하였던 안동 마애로 옮겨 진성이씨 망천파를 형성하였다. 막내 이계양은 예안의 온계리에 정착하여 진성이씨 온혜파를 형성하여 재지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고, 그의 손자대에 와서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와 퇴계 이황이 출현함으로써 진성이씨 가문은 조선 최고의 명문으로 발돋움하였다.

이계양의 자는 달보(達父), 호는 노송정(老松亭),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부친은 선산부사 이정(李禎), 모친은 지숙주군사 김정(金挺)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함과 외모가 빼어나 형제 가운데 부모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젊어서 백숙조인 이중위(李仲位)에게서 양육되었는데, 이중위의 집안은 부유했으면서도 이계양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뜻을 가다듬고 학문에 정진하여 결국 1453년(단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하지만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독점한 다음 결국 어린 단종을 폐위하자, 벼슬길의 뜻을 접고 낙향하여 자연에 은거하며 후손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계양의 거주지는 원래 온혜리가 아니었다. 혼인 후 처가를 따라 예안의 서촌과 부라촌에 거주하다가 봉화훈도가 되어 봉화로 가던 중 온계를 지나면서 그 빼어난 산수에 감탄하여 잠시 머물렀는데, 마침 고개를 넘던 한 승려에게서 이곳에 집을 지으면 귀한 자식이 나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온계로 옮겼다. 승려의 예언이 정확했던 것일까. 이계양의 두 아들 중 맏아들인 이식(李埴, 1463~1502)의 일곱째 아들이 바로 퇴계 이황이다. 이계양 자신은 학문을 연마하는 데 도움을 받지 못했으나 학문을 부지런히 갈고 닦는 두 아들에게는 따뜻한 위로의 편지를 보내는 등 뒷받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또 평소 성품이 고요한 데다 여유로워 출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자제들을 교육할 때는 온후한 자세로 경사를 가르치면서도 현학적 관심보다는 정당한 처신의 방안을 모색하는 실용적인 부분에 관심을 갖도록 강조하였다.

계절이 빠르게 흘러 세모에 가까워져서
눈 덮인 산이 절 문 앞을 깊이 에워쌌네
찬 창가에서 힘든 공부하는 너희 생각하며
맑은 꿈이 때때로 책상가엘 가곤 한다네

節序駸駸歲暮天
雪山深擁寺門前
念渠苦業寒窓下
淸夢時時到榻邊

이 시는 이계양이 청량산 용수사에서 공부하던 이식과 이우(李堣) 두 아들에게 부친 시로, 절에서 학문 연마에 매진하는 자식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가 엿보인다. 이계양은 온계를 무대로 경제적 기반과 함께 폭넓은 교유를 통한 사회적 기반을 확충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자손들의 교육을 통해 가문의 위상을 부각하는 데에도 성의를 다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손자대에 가서 온계(溫溪) 이해(李瀣)와 퇴계 이황이라는 걸출한 위인이 탄생하였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0호인 노송정종택은 퇴계 이황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퇴계태실이라고도 한다. 솟을대문인 성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노송정이 자리하고 좌측으로 ㅁ자형 정침이, 우측에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노송정은 4칸 규모의 복집으로 동쪽 3칸은 마루이고 서쪽의 1칸은 방이다. 방 앞에는 마루가 놓여 있다. 정침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전면에 사랑을, 좌우에 익사를 거느린 ㅁ자형을 이룬다. 그러나 독특하게 방 1칸만이 안마당 북쪽에서 목젖처럼 남쪽을 향해 돌출된 누마루형태인데, 바로 퇴계 이황이 태어난 퇴계태실이다. 퇴계태실의 길이는 큰 사람이 누우면 머리와 발끝이 양쪽 벽에 닿을 만하고 폭은 두 사람 정도가 겨우 누울 수 있는 정도로 작다. 약 70여 년 전에 개축되기는 했지만, 조선 사대부가의 기본틀을 유지하고 있어 태실과 같은 독특한 기능을 가진 방과 상류주택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가치 높은 건물이다.

참고문헌
  • 김도화, 「노송정기」, 『척암집』 권15.
  • 이만인, 「경류정노송기」, 『용산집』.
  • 『한국의 편액Ⅱ』, 한국국학진흥원, 2016.
  • 『안동의 현판(上)』, 안동민속박물관, 2004.
  • 설석규, 「온계 이해의 학문세계와 현실대응 자세」, 『온계선생종택복원낙성식』, 온계선생종택복원추진위원회, 2011.
  • 윤천근, 『안동의 종가』, 지식산업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