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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산재(訥山齋)

의성김씨 황전문중(義城金氏 黃田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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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눌산재(訥山齋)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41.0x98.0x3.9
  • 건물명 눌산재(訥山齋)
  • 공간명 의성김씨 황전문중(義城金氏 黃田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봉화 황전-법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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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산재(訥山齋)

눌산재(訥山齋)


눌산재(訥山齋)는 경상북도 봉화군 거촌리 황전의 의성김씨(義城金氏) 문중에서 기탁한 편액이다. ‘눌산’이라는 재호는 지명에서 취하였는데, 눌산은 현재 봉화군 법전면에 속한 마을이다. 영조로부터 당대 제1인이라는 칭송을 받은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1674~1756)도 이 눌산에서 자신의 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황전은 해저와 더불어 봉화를 대표하는 의성김씨 집성촌으로 황파(黃坡) 김종걸(金宗傑, 1628~1708) 등 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이 쓴 행서체이다.

글씨는 굳세고 두터운 필획이라는 한 가지만으로도 평범함을 넘었다. 붓을 깊이 사용한 기필은 두텁고 굳센 필획을 만들 뿐 기필 수필에서 다른 형태가 없다. 극도로 단순하다. 그 단순함으로 긴밀하게 구성한 눌(訥) 자는 내부 조임의 산뜻함에 놀랍다. 성글게 구성한 산(山) 자는 가운데 세로획이 우뚝하여 주변을 압도한다. 山 자의 구성은 이 편액의 백미다. 山 자의 좌우 획을 줄인 결과 편액의 중앙 공간을 크게 확보할 수 있었고 마침내 복잡한 재(齋)의 필획도 산(山)자와 같이 굳센 필획을 사용할 여유를 얻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의성김씨 황전문중(義城金氏 黃田門中) 소개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눌산리는 남쪽으로는 낙동강, 북쪽으로는 36번 국도, 동쪽으로는 임기, 서쪽으로는 소천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한가운데 해발 607m인 월암산을 두고 그 사방 산록에 자리 잡은 여러 자연 부락들로 이루어져 있다. 눌산은 두 마을로 나뉘는데, 감보개와 눌산이다. 늘 감보개 사람에게 눌려 지냈다 하여 눌산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며 위쪽의 감보개는 상눌산, 아래쪽의 눌산은 하눌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눌산에는 의성김씨 가문 인물의 묘소가 있어 눌산재는 묘역과 제사를 담당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의성김씨 황전 문중이 세거하는 곳은 봉화군 봉화읍 거촌 2리이다. 이곳에 사는 의성김씨는 의성김씨의 한 갈래가 예안에 거주하면서 예안김씨(禮安金氏)로 본관을 쓰다가 100여 년 전에 다시 의성김씨로 본관을 되돌렸다. 그러므로 이들은 조선시대는 예안김씨였다가 본관을 되돌린 뒤에는 의성김씨가 되었기에 황전 문중의 인물 정보에 대해 어떤 자료는 예안김씨, 어떤 자료는 의성김씨로 표기되어 있다.

이 마을이 황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마을 앞산에 황학이 떼를 지어 서식하였는데, 마을 밭에 자주 내려와 온 들이 누렇게 장관을 이루었다. 그래서 황전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것. 속칭 ‘누른밭[黃田]’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은 본래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살던 마을이었다. 어느 날 지금의 황전마을에 처음 들어온 의성김씨의 조상되는 김흠(金欽)이 시종을 두어 명 데리고 구봉산에 올라가서 매를 날리며 꿩 사냥을 하였다. 그가 산에서 바라보니 매에 쫓긴 꿩이 황전 남진사의 집으로 날아들었는데, 남진사의 딸이 날아든 꿩을 감추었다가 매가 사라진 뒤 꿩을 살려 보냈다. 김흠은 남진사댁 규수의 착한 마음씨에 감탄하였고 뒷날 그 규수의 후덕함을 생각하고 남진사댁에 청혼을 하였다. 마침내 그는 남씨 가문에 장가들어 안동에서 황전으로 와 처가살이를 하였다. 황전에 의성김씨가 처가살이를 하고부터는 남씨가 한 집 두 집 이곳을 떠나기 시작하더니 20년이 못가서 남씨는 한 집도 남김없이 떠나고 말았다. 결국 이 마을은 의성김씨가 번성하여 마을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후 황전에는 외손이 들어오면 본손이 망한다는 말이 생겨났고 황전 큰 마을에는 지금도 외손은 물론 타성(他姓)이 들어와 살지 못한다. 이때 진사 남구수가 살던 경암헌(畊菴軒)고택은 사위 김흠에게 물려져 지금까지도 황전 의성김씨 종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황전마을에 처음 입향한 김흠은 자가 이경(而敬)이며 통훈대부, 훈련원봉사였다. 부친은 김몽경(金夢卿)이다. 김흠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구수의 딸이다. 그는 장인 집을 상속받아 의성김씨 한 갈래가 봉화 황전에서 세계를 이어갈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김흠의 손자인 김종걸(金宗傑, 1628~1708)은 자는 국경(國卿), 호는 황파(黃坡)이며 부친은 김해윤(金海潤), 모친은 봉화금씨(奉化琴氏) 금성현(琴聲賢)의 딸이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창설(蒼雪) 권두경(權斗經), 귀애(龜厓) 이완(李琓),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등이 인근에 살면서 김종걸을 종유하였다. 1650년(효종 1) 황전마을에 도암정을 지었으며 후진 양성을 위해서 봉산서당도 지었다. 1708년(숙종 34) 은일로 천거되어 통정대부부호군에 제수되었으며 사후에는 안동 사림들의 천거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동래정씨(東萊鄭氏) 정사명(鄭思命)의 딸이다. 2남을 두었는데, 김언(金漹)과 김철(金澈)이다. 저술로 2권 1책의 『황파집黃坡集』이 있다.

경암헌고택은 사랑채, 문간채, 안채, 좌우 부속채, 사당 등 5채의 건물이 서로 어울려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이고 6단으로 이루어진 석축 위에 올라서 있으며 앞쪽으로 정면 3칸, 측면 반 칸 정도 넓이의 앞마루를 두었다. 행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고 동쪽 끝 칸은 중문이 자리 잡고 있다. 좌우의 부속채들은 안채의 아래쪽으로 지붕을 들이밀면서 하나로 연결된다. 건물군의 북쪽 일선을 이루는 것은 안채이지만, 그 안채 속으로 좌우 부속채의 지붕이 밀고 들어온 형상을 취하고 있다. 사랑채의 동북쪽 영역에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바깥마당의 동북쪽 끝에 조금 높은 기단을 마련하여 올라앉아 있으며 울타리 없이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이루어져 있다. 경암헌고택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김종걸, 『황파집』.
  • 이만도, 『향산집』.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봉화군청(http://www.bonghw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