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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菊史)

의성김씨 황전문중(義城金氏 黃田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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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국사(菊史)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23.0x48.0x2.6
  • 건물명 국사(菊史)
  • 공간명 의성김씨 황전문중(義城金氏 黃田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봉화 황전-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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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菊史)

국사(菊史)


국사(菊史)는 경상북도 봉화군 거촌리 황전의 의성김씨(義城金氏) 문중에서 기탁한 편액이다. ‘국사’는 국화를 애상하는 문필가라는 뜻으로, 속세를 떠나 숨어사는 은자를 비유한다. 화려하지 않고 은은함을 지향하는 국화는 사군자의 하나이며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의리를 꺾지 않는 선비정신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킨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글에 “매번 백이숙제의 「채미가采薇歌」를 읊조리고, 때때로 도연명의 「국사菊史」를 열람한다.[每吟淸聖之薇歌, 時覽靖節之菊史]”라고 한 문구가 있다. 편액의 글씨는 조영원(趙泳元)의 친필이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극도로 단순하고 명쾌한 붓놀림이 압권이다. 史에서 과감한 기필 후 단 하나의 동작으로 그어진 획은 붓의 자가 발전에 의지한 것이다. 바로 이어 우측에서 맺고 즉시 풀어낸 필획 역시 자가발전에 의한 도작이다. 그 다음과 다음 필획은 이 리듬을 타고 몇 차례 반복한 동작이 있을 뿐이다. 菊에서 가로획 두 개를 생략한 것은 문자 이해가 깊은 서사자의 탁월한 선택이다. 하나의 서체에 머무르지 않고 초서와 행서를 적절히 혼합한 점 역시 문자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의성김씨 황전문중(義城金氏 黃田門中) 소개


의성김씨 황전 문중이 세거하는 곳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 2리이다. 이곳에 사는 의성김씨는 의성김씨의 한 갈래가 예안에 거주하면서 예안김씨(禮安金氏)로 본관을 쓰다가 100여 년 전에 다시 의성김씨로 본관을 되돌렸다. 그러므로 이들은 조선시대는 예안김씨였다가 본관을 되돌린 뒤에는 의성김씨가 되었기에 황전 문중의 인물 정보에 대해 어떤 자료는 예안김씨, 어떤 자료는 의성김씨로 표기되어 있다.

이 마을이 황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마을 앞산에 황학이 떼를 지어 서식하였는데, 마을 밭에 자주 내려와 온 들이 누렇게 장관을 이루었다. 그래서 황전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것. 속칭 ‘누른밭[黃田]’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은 본래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살던 마을이었다. 어느 날 지금의 황전마을에 처음 들어온 의성김씨의 조상되는 김흠(金欽)이 시종을 두어 명 데리고 구봉산에 올라가서 매를 날리며 꿩 사냥을 하였다. 그가 산에서 바라보니 매에 쫓긴 꿩이 황전 남진사의 집으로 날아들었는데, 남진사의 딸이 날아든 꿩을 감추었다가 매가 사라진 뒤 꿩을 살려 보냈다. 김흠은 남진사댁 규수의 착한 마음씨에 감탄하였고, 뒷날 그 규수의 후덕함을 생각하고 남진사댁에 청혼을 하였다. 마침내 그는 남씨 가문에 장가들어 안동에서 황전으로 와 처가살이를 하였다. 황전에 의성김씨가 처가살이를 하고부터는 남씨가 한 집 두 집 이곳을 떠나기 시작하더니 20년이 못가서 남씨는 한 집도 남김없이 떠나고 말았다. 결국 이 마을은 의성김씨가 번성하여 마을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후 황전에는 외손이 들어오면 본손이 망한다는 말이 생겨났고 황전 큰 마을에는 지금도 외손은 물론 타성(他姓)이 들어와 살지 못한다. 이때 진사 남구수가 살던 경암헌(畊菴軒)고택은 사위 김흠에게 물려져 지금까지도 황전 의성김씨 종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황전마을에 처음 입향한 김흠은 자가 이경(而敬)이며 통훈대부, 훈련원봉사였다. 부친은 김몽경(金夢卿)이다. 김흠의 부인은 영양남씨 남구수의 딸이다. 그는 장인 집을 상속받아 의성김씨 한 갈래가 봉화 황전에서 세계를 이어갈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김흠의 손자인 김종걸(金宗傑, 1628~1708)은 자는 국경(國卿), 호는 황파(黃坡)이며, 부친은 김해윤(金海潤), 모친은 봉화금씨(奉化琴氏) 금성현(琴聲賢)의 딸이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창설(蒼雪) 권두경(權斗經), 귀애(龜厓) 이완(李琓),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등이 인근에 살면서 김종걸을 종유하였다. 1650년(효종 1) 황전마을에 도암정을 지었으며 후진 양성을 위해서 봉산서당도 지었다. 1708년(숙종 34) 은일로 천거되어 통정대부부호군에 제수되었으며 사후에는 안동 사림들의 천거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동래정씨(東萊鄭氏) 정사명(鄭思命)의 딸이다. 2남을 두었는데, 김언(金漹)과 김철(金澈)이다. 저술로 2권 1책의 『황파집黃坡集』이 있다.

경암헌고택은 사랑채, 문간채, 안채, 좌우 부속채, 사당 등 5채의 건물이 서로 어울려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이고 6단으로 이루어진 석축 위에 올라서 있으며 앞쪽으로 정면 3칸, 측면 반 칸 정도 넓이의 앞마루를 두었다. 행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고 동쪽 끝 칸은 중문이 자리 잡고 있다. 좌우의 부속채들은 안채의 아래쪽으로 지붕을 들이밀면서 하나로 연결된다. 건물군의 북쪽 일선을 이루는 것은 안채이지만, 그 안채 속으로 좌우 부속채의 지붕이 밀고 들어온 형상을 취하고 있다. 사랑채의 동북쪽 영역에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바깥마당의 동북쪽 끝에 조금 높은 기단을 마련하여 올라앉아 있으며 울타리 없이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이루어져 있다. 경암헌고택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김종걸, 『황파집』.
  • 이만도, 『향산집』.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봉화군청(http://www.bonghw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