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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구당(肯構堂)

영천이씨 농암종택(永川李氏 聾巖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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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긍구당(肯構堂)
  • 글자체 전서(篆書)
  • 크기 60.0x117.3x5.9
  • 건물명 긍구당(肯構堂)
  • 공간명 영천이씨 농암종택(永川李氏 聾巖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도산면 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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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구당(肯構堂)

긍구당(肯構堂)


긍구당(肯構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에 있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종택 별당 편액이다. ‘긍구’는 『서경』, 「주서周書」 ‘대고(大誥)’에 “만일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작정하여 이미 그 규모를 다 만들어 놓았거늘 그 아들이 기꺼이 당의 터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면,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弗肯堂 矧肯構]”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로, 자손이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하는 것을 뜻한다. 편액의 글씨는 조선 중종 때의 인물로 시서화의 삼절(三絶)로 불렸던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 1491~1554)이 전자(篆字)로 썼다.

필획이 굳세고 역동적이다. 전서 필획이 두께의 변화가 없이 강하면서 시원한데 비해 이 글씨는 속도감과 함께 살짝 볼륨을 가미하고 있다. 전서가 고전적이고 기세의 장중함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 이 글씨는 장중함에 경쾌함이 추가된 듯하나 큰 성과가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영천이씨 농암종택(永川李氏 聾巖宗宅) 소개


영천이씨(永川李氏) 농암(聾巖)종택은 고려 초기 영천 출신 평장사 이문한(李文漢)의 후손이다. 고려 말 군기시소윤을 역임한 영천 출신의 낙은(洛隱) 이헌(李軒)이 1350년(충정왕 2) 경에 예안의 부내[분천汾川]를 지나가다 수려한 산수에 반해 이거하였다. 영천이씨가 이곳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성씨들에 비해 좀 더 일찍 들어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시 도산은 강력한 재지 기반을 지녔던 토성 선성김씨(宣城金氏)와 선성이씨(宣城李氏)가 마침 떠나 버려 텅 비어 있었다. 퇴계의 조부 노송정(老松亭)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이 이웃 온혜에 왔을 때 “주민 한 집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텅 빈 강산이었다. 안동의 영천이씨들은 이렇게 부내에서의 삶의 터전을 열었다.

입향조 이헌은 형제를 두었는데, 맏이 이파(李坡)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흥현감을 지냈다. 그의 외손녀가 노송정 이계양의 배위이니, 곧 퇴계 이황의 조모이다. 따라서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은 7촌의 인척이 된다. 둘째 이오(李塢)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직제학으로 판서 황유정(黃有定)의 손녀사위가 되었고, 관찰사 금숙(琴淑)과 사돈관계였다. 이파의 아들로는 이효손(李孝孫)과 이성손(李誠孫)이 있다. 이효손은 봉례를 역임하였으며, 이효손의 첫째 이흠(李欽)은 인제현감을, 둘째 이균(李鈞)은 직장을 지냈다. 이흠의 장남이 바로 청백리에 관리로 뽑혔고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창도자로 일컬어지는 농암 이현보이다.

이현보의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과 설빈옹(雪鬢翁),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부친은 이흠(李欽), 모친은 안동권씨(安東權氏) 권겸(權謙)의 딸이다. 1467년(세조 13) 경상도 예안현의 분천리에서 태어났으며, 1485년(성종 16) 19세 때 부친의 엄명을 받고 예안향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발분하여 공부에 진력했으며 20세 때 당대 대표적 문장가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서 이황의 숙부 송재(松齋) 이우(李堣)와 함께 동반 급제하였다.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 춘추관기사, 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세자가 공부하는 서연에서 강관이 실수한 일을 이현보가 보고하자 연산군은 당일로 보고하지 않고 하루가 지난 뒤에 보고했다는 트집을 잡아서 그를 의금부에 하옥하고 이어서 안동의 안기역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어 밀양부사, 안동부사, 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 성주목사 등을 거치면서 가는 곳마다 선정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렇듯 외관직 선호 이유는 부모가 연로해서 가까이 모시기 위함이었다. 1525년(중종 20) 부친의 나이가 80세에 이르자 사직을 청하였고 이후로는 대구부사, 평해군수, 영천군수, 경주부윤, 경상도관찰사 등 주로 고향과 가까운 외직을 선택하였다. 결국 1542년(중종 37)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가롭게 지냈다. 만년에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된 기로소(耆老所)에 입소되는 영예를 얻었으며, 은퇴 후 거듭되는 상경 명령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지 않으니 나라에서는 1품인 숭정대부의 품계를 내렸다. 그래서 조선 전기에 보기 드문 재야정승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농암은 관료 문인의 문학이 성행하는 시기에 강호지락(江湖之樂)과 강호지미(江湖之美)라는 새로운 문학 세계의 지평을 열었으며, 「어부가漁父歌」, 「어부단가漁父短歌」를 비롯한 「효빈가效嚬歌」, 「농암가聾巖歌」, 「생일가生日歌」 등 한글로 된 시가 작품을 남겼다.

영천이씨 농암종택은 원래 도산구곡 중 4곡인 분천곡에 있었다. ‘분천(汾川)’은 우리말로 ‘부내’라 불린다. 부내는 전국 최고의 살기 좋은 터전으로 꼽히는 도산구곡 중에서도 으뜸가는 곳이었다. 농암은 “정승 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다.”고 찬탄하였다. 그러나 입향한 지 620여 년이 흐른 1974년 안동다목적댐 건설로 모래톱 맑고 물새 한가롭게 노닐던 부내 앞 강변은 물속으로 영원히 수장되어 버렸다. 종택도, 거기에 딸린 긍구당도, 긍구당 앞에 있던 아홉 형제 숙질이 함께 가지런히 인끈을 걸어 놓아 구인수라 불리던 홰나무도 물속에 수장되었다. 이후 25년이 지난 1994년 무렵부터 농암종택 후손들 사이에 종택을 이건하여 복원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농암 종손 이성원은 실향의 실의를 접고 새로운 부내를 만들 준비에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낙점된 곳이 바로 청량산 농암 묘소 뒤편, 도산면 가송리다. 2000년 들어 정부는 경상북도 북부에 유교문화권역을 만들기로 하였다. 2001년 드디어 국책사업의 기본 계획도가 완성되었고, 2003년 긍구당과 사당이 이건되고 종택의 정침과 사랑채가 복원되었다. 이어 2004년에는 문간채와 부속채가 지어졌으며, 2005년에는 분강서원이, 2006년에는 애일당, 농암각자, 신도비 등의 문화재와 건물이 이건되고 명농당, 강각 등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농암종택은 20세기 후반에 도산구곡의 4곡에서 8곡으로 장소가 완전히 이동된 흔치 않은 예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된 긍구당은 1370년경에 건립된 역사적 건물로, 농암 이현보의 고조부인 이헌이 지었다. 농암 당시 이미 퇴락한 상태였지만, 농암은 87세에 아들 이문량(李文樑, 1498~1581)과 함께 건물을 중수하여 긍구당이라 명명하였다. 긍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반으로 된 작은 규모의 ㄴ자형 건물이다. 온돌방은 후면에 두었고 전면 3칸은 모두 누마루로 꾸몄으며 마루 끝에는 난간을 돌렸다. 누하부는 목주를 받쳤으며 온돌방에는 아궁이를 마련하였다. 규모가 작고 꾸밈새가 검박하나 전면에 큰 누마루를 두어 별당으로서의 여유와 운치가 있으며, 마루에는 농암 88세 생일에 축하시를 쓴 친인척의 시가 농암의 시와 함께 판각되어 있다. 문중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대개 긍구당에서 결정되는 만큼 종택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참고문헌
  • 주승택, 「농암 이현보의 생애와 문학」, 『선비정신과 안동문학』, 2002.
  • 『안동의 현판』, 안동민속박물관, 2004.
  • 김서령, 『지금도 「어부가」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 안동 농암 이현보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1.
  • 이성원,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 푸른역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