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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원당(慕遠堂)

인동장씨 여헌종택(仁同張氏 旅軒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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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모원당(慕遠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68.0x110.0x7.8
  • 건물명 모원당(慕遠堂)
  • 공간명 인동장씨 여헌종택(仁同張氏 旅軒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구미시 인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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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원당(慕遠堂)

모원당(慕遠堂)


모원당(慕遠堂)은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에 있는 인동장씨(仁同張氏) 여헌(旅軒)종택의 당호 편액이다. ‘모원’은 선조를 공경하고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이 직접 명명하였다. 여헌은 「모원당기慕遠堂記」에서 “저 들판은 선조들이 밭을 갈고 수확하던 들판이며, 저 도로는 선조들이 밟고 다니던 도로이며, 저 강산은 선조들이 노닐며 감상을 하던 강산이다. 선조들이 덕을 쌓으신 덕분으로 자손들도 또한 이 들판에서 갈고 수확하며 이 도로를 밟고 다니고 이 강산을 노닐며 감상하니, 사람들이 과연 제 스스로 밭 갈고 제 스스로 수확하며 제 스스로 밟고 다니고 제 스스로 노닐며 제 스스로 감상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이는 모두가 선조들의 덕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하니 어찌 조상에 대한 효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그러므로 나의 당의 이름을 ‘모원당’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조상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추모의 마음을 담아 새로 지은 집에 모원당이라는 편액을 건 이유다.

붓 끝을 감춘 장봉의 필법, 깊게 시작한 기필로 힘차게 나아간 필치는 꿈틀거리는 역동적 필세를 가능케 했고, 가로획과 세로획의 연결부분에서 만나고 풀어내는 처리는 고법의 웅장함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필획의 느낌은 따뜻하다. 한지에 진한 농묵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정겨운 모습니다. 오래된 선조를 그리워함(慕遠)은 숙연하지만, 선고(先考)와 같이 지내던 어린 시절의 추원(追遠)은 즐겁기만 하다. 편액의 글씨는 그 시절 추원(追遠)을 생각하는 듯 정답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인동장씨 여헌종택(仁同張氏 旅軒宗宅) 소개


인동장씨 여헌종택은 고려 때 벽상공신에 책록된 신호위 상장군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다. 그 후손들이 옥산에 정착하여 본관을 옥산(玉山)으로 삼았다가 옥산이 인동으로 개칭됨에 따라 인동이 관향이 되었다. 고려 말 장안세(張安世)는 함흥부윤과 덕녕부윤을 지냈는데, 함흥부윤으로 재직할 때 치수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홍수의 범람을 막았으며 만세교라는 70여 칸 규모의 큰 다리를 세웠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였다. 이런 절의로 인하여 그는 별세 후 수백 년이 지난 1834년(순조 34)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았고 세상에서 이른바 두문동 72현의 한 분으로 추앙되었다.

장안세의 손자 장수(張脩)는 조선조의 벼슬에 나아가 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였으며, 장보(張俌)와 장우(張俁) 두 아들을 두었다. 둘째 장우가 바로 여헌 장현광의 5대조이다. 장우는 인동장씨 남산파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인동장씨들이 옥산을 중심으로 한 인동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시조 장금용 때부터지만, 인동장씨 가운데 한 파인 남산파가 현재 종택이 위치하는 인동 남산 아래에 자리 잡은 것은 장우 때부터이기 때문이다. 장우의 아들 장승량(張承良)은 부친이 터를 잡아 놓은 남산을 떠나 성주 암포(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로 이주하였는데, 남산파가 암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장승량의 조부인 장수가 암포에 살던 판양양부사 이번(李蕃)의 딸과 혼인을 하면서부터이다. 성주 암포로 이주하였던 남산파가 다시 인동 남산으로 돌아온 것은 장승량의 증손 장렬(張烈) 때이다.

장렬은 증조부 장승량이 서울에서 내금위 어모장군으로 있던 시절에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20세가 된 뒤 성주 암포로 귀향하였다가 암포의 근거지를 아우 장희(張熙)에게 맡기고 다시 옛날에 살던 인동 남산으로 거처를 옮겨 남산파의 터전을 다시 닦았다. 여헌의 부친인 그는 죽정(竹亭) 장잠(張潛)과 함께 집안 간의 계를 만들고 족보를 편찬했으며 선조 묘소에 제사를 지내고 집안 간 친목을 도모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월 초하루마다 자제들을 이끌고 학문을 강론하고 암송함으로써 집안의 학문·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장현광의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부친은 장렬, 모친은 경산이씨(京山李氏) 이팽석(李彭錫)의 딸이다. 그는 인동에서 성장하였으며 어려서 학거(鶴渠) 장순(張峋, 1532~1571)에게 배웠다. 장순은 장현광의 11촌 숙부로 학행이 독실하여 명성이 있었기에 장현광이 학자로 대성하는 데 큰 역할은 하였다. 장현광은 15~16세 때 장순이 갖고 있던 『성리대전性理大全』, 「황극편皇極篇」을 차람하면서 학문에 더욱 빠져들어 독학하였다. 장현광을 두고 불유사승(不由師承)이라 하여 뚜렷한 사승관계가 없다고 인식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독학의 결과 그는 18세에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짓는데, 이 가운데 제10첩 ‘반궁첩(反躬帖)’의 “능히 천하의 제일 사업을 본받는 자가 바로 천하의 제일 인물이다.”라는 구절을 보아 학자로서의 포부를 알 수 있다. 1591년(선조 24)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94년(선조 27) 예빈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 해 보은현감에 제수되어 부임하였지만 여러 번 사직을 청한 뒤 허락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현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1637년(인조 15)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천 땅 입암(지금의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으로 들어가 반년을 지내다가 그해 9월 6일 경제당 만욱재에서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장현광이 살던 남산의 집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이에 1606년(선조 39) 장현광은 제자인 만회당(晩悔堂) 장경우(張慶遇)를 위시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폐허 위에 집을 세로 짓고 모원당이라 명명하였다. 모원당은 청천당, 사당과 함께 2000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0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2005년 완전 해체하고 새로 지은 종택으로 들어가는 왼쪽 어귀에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는 모원당은 얼핏 보면 일자형의 홑처마 집으로 정면 6칸에 측면 1칸으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쪽 옆에 달아 낸 각각 반 칸씩의 서고와 부엌이 눈썹지붕 아래 덮여 있으므로 정면을 4칸으로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좌우 대칭의 원칙을 깨고 4칸 가운데 오른쪽 두 칸을 대청으로 삼고 왼쪽 두 칸을 방으로 삼고 있다. 또 편액을 정면 처마 밑이나 대청 한복판에 걸지 않고 대청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걸어 두었고, 서고 출입은 앞으로 부엌 사용은 뒤로 해야 하는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 모원당의 특색은 장식성이 극도로 배제된 간결한 구조와 단순 소박한 기품으로,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의 품성과 미감이 오롯이 담겨 있다. 정원 한복판에는 거대한 회화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박고 서 있는데, 1606년(선조 39) 모원당을 지으면서 장현광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진다. 회화나무는 40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푸르른 청춘 마냥 싱그럽기 그지없다.

참고문헌
  • 장현광, 「모원당기」 『여헌집』 권9.
  • 최석기, 『한국 경학가 사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8.
  • 이종문, 『모원동 회화나무, 구미 여헌 장현광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1.
  •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