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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서(溪西)

봉화 전주이씨 송월재 종택(奉化 全州李氏 松月齋宗宅)

41.0x68.5x3.1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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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계서(溪西)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1.0x68.5x3.1
  • 건물명 계서(溪西)
  • 공간명 봉화 전주이씨 송월재종택(奉化 全州李氏 松月齋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봉화 법전면 풍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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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서(溪西)

계서(溪西)


계서(溪西)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음지마을에 있는 송월재(松月齋)종택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이성필(李誠弼, 1853~1927)의 별당이 법전마을을 관통하는 법전천 서쪽에 위치하는데, 그곳에서 취한 듯하다. 그는 중년 이후에 거처하는 곳 옆에 따로 작은 집을 짓고 계서라 명명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편액의 글씨는 강한 필획에 거침없이 활달하다. 기필은 깊고 강하게 시작하였고, 수필은 정확하여 섬세하게 마무리된다. 그러나 속도는 급한 편이다. 글자 속 내부공간을 긴밀하게 하지 않았는데도 두 글자가 이루는 화면은 웅혼한 점은 특별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봉화 전주이씨 송월재종택(奉化 全州李氏 松月齋宗宅) 소개


봉화 전주이씨(全州李氏) 송월재종택은 태종대왕의 별자(別子, 제삼서자第三庶子 신빈신씨信嬪辛氏 소생)인 온녕군 정(程)의 후손이다. 온녕군은 아들이 없어서 아우인 근녕군 농(襛)의 아들인 우산군 종(踵)을 양자로 들여 여섯 아들을 두었다. 우산군의 여섯 아들은 모두가 당대의 명류들이었지만, 연산군 때 뜻밖의 화를 당하여 재산을 몰수당하고 결국에는 7부자가 같은 날 죽음을 맞았다. 이후 중종 때 그들에게 작위를 추증하여 억울함을 풀어주고 몰수한 가산을 돌려주었다. 우산군의 7부자를 세칭 칠공자(七公子)라 하는데,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은 「칠공자전七公子傳」을 지어 세조의 왕위 찬탈의 부당성과 연산의 사화 때 억울하게 죽은 그들의 비극적 생애를 기술하였다. 한 집안의 비극적 삶은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쳐 이회(李淮, 1490~1560)와 이민(李敏, 1510~1562), 그리고 이성립(李成立, 1528~1594) 대에는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다.

경기에 터를 잡고 생활하던 온녕군 후손이 남쪽 지방을 찾아 옮기는 낙남(落南)을 시작한 것은 추만(秋巒) 이영기(李榮基, 1583~1661) 때부터다. 그는 유년시절 정승인 유영경(柳永慶, 1550~1661)과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1628)에게 대성할 그릇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임진왜란을 만나 부모를 여의고 백공(伯公)과 함께 이모 황씨에게 길러졌다. 이모 황씨는 이들이 외롭고 힘든 것을 안타깝게 여겨 굳이 공부를 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영기는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어려운 가운데서도 노력하여 마침내 문사가 박달(博達)하게 되었다. 이후 이모가 풍기의 친정으로 부모를 뵈러 가자 이모와 함께 남행을 하여 외가에 의탁하다가 안동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를 들었다. 당시 안동권씨는 그 지역의 유수의 가문으로 이영기의 아내는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증손 권래(權來)의 딸이었다. 봉화 지역에 세거하던 충재 집안과의 혼인은 낯설고 물설은 타향에 전주이씨 집안이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의 심지를 알아본 재상 유영경이 음직(蔭職)으로 천거하자 이영기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은 채 도를 즐기며 처사의 길을 택한 은거불사(隱居不仕)의 삶의 방식은 자식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영기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특히 넷째인 송월재(松月齋) 이시선(李時善, 1625~1715)은 호방한 기질을 타고나 한평생 시류를 따르지 않았고 특별한 스승 없이 독학으로 자신만의 학문 세계를 열어 나갔다. 송월재 이시선은 이성필의 7대조이다.

이성필의 자는 성보(聖甫), 호는 계서(溪西),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부친은 이석황(李錫璜), 모친은 하양허씨(河陽許氏) 허운(許橒)의 딸이다. 이성필은 1853년(철종 4)에 태어났으며 재종숙인 계소(溪巢) 이석영(李錫永)의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자고 먹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독서에 매진하였다. 경전과 사서를 두루 섭렵하였고 시문을 정밀하게 익혔으며,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이 봉화 춘양에 와서 우거(寓居)하자 자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아 견문을 넓혔다. 하지만 과거시험에 여러 번 떨어져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1905년 영릉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 사직서참봉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6품계를 뛰어넘어 통훈대부에 올랐으나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0년에 족숙인 주은(柱隱) 선생이 나라를 위해 순국하자 젊은이들에게 “우리가 선생의 뒤를 따를 수 없다면 농사와 학문에 힘써 선왕의 옛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18년에 고종이 승하하자 산릉(山陵)에 참여하였으며, 중년 이후에 거처하는 곳 옆에 따로 작은 집을 짓고 계서라 명명한 뒤 제자들을 가르쳤다. 1927년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5세였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6호인 송월재종택은 송월재 이시선이 명청동(지금의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에 살림집을 짓고 서재를 만들어 학문을 연구했던 곳으로, 7대손인 천로(天老) 이하필(李夏弼, 1847~1909)이 1880년경 지금의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음지마을로 옮겨지었다. 지금의 자리는 옮겨온 집에서 50m 정도 떨어져 있다. 종택은 음지마을의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남동향한 몸채가 크게 자리 잡고 우측에 사당이 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앞에 중문간채와 사랑채가 길게 놓이고 뒤편에 안채가 ㄷ자형으로 안마당을 에워싼다. 옆에 있는 사당은 원래 법전리에 있었다가 1·4후퇴 때 소실되었고, 지금은 후손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송월재 불천위 사당이 있다. 원래 대문채는 사라지고 없지만, 종가의 구색과 품격을 비교적 잘 갖추고 있어 음지마을을 대표하는 전통주택으로 도로 건너편 양지마을의 봉화 법전강씨종택(민속자료 제40호)과 함께 법전리의 전통적 풍광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문헌
  • 이중철李中轍, 「통훈대부사직서참봉계서이공행장通訓大夫社稷署參奉溪西李公行狀」, 『효암집曉庵集』 권7.
  • 권진호, 「18세기 봉화지역 학자들의 학문경향-전주이씨가를 중심으로」, 『18세기 영남의 한문학-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