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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당(養眞堂)

풍산류씨 대종택 양진당(豐山柳氏 大宗宅 養眞堂)

84.2x17.8x8.2 / 행서(行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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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양진당(養眞堂)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84.2x17.8x8.2
  • 건물명 양진당(養眞堂)
  • 공간명 풍산류씨 대종택 양진당(豐山柳氏 大宗宅 養眞堂)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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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당(養眞堂)

양진당(養眞堂)


양진당(養眞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 종택의 편액이다. ‘양진’은 류운룡의 6대손 류영(柳泳, 1687~1761)의 호로, 참 마음을 기른다는 의미이다. 『맹자』, 「진심盡心」 하권에 “마음을 수양하는 데에는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그 사람됨이 욕심이 적으면 비록 인의예지와 같은 본심이 있지 않더라도 그것이 적을 것이며, 그 사람됨이 욕심이 많으면 비록 인의예지와 같은 본심이 많더라도 그것이 적을 것이다. [養心 莫善於寡欲 其爲人也寡欲 雖有不存焉者 寡矣 其爲人也多欲 雖有存焉者 寡矣]”고 한데서 인용한 듯하다.

편액의 글씨가 담백하다. 편안한 붓놀림인 듯 외견상 모가 나지 않고 부드럽다. 그러나 필획 속에서 붓의 꺾임이 강한 성질을 만들고 있다. 필획의 형태도 시작과 마무리에 구분이 없고 글자 구성 또한 단순 간결하다. 양(養)의 상부와 당(堂)의 하단부에서 간결함, 진(眞)의 내부 공간처리 등은 서사자의 성정이 발현된 결과로 보인다. 편액에 서린 극도의 절제미와 ‘마음을 기른다’는 양진(養眞)의 뜻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풍산류씨 대종택 양진당(豐山柳氏 大宗宅 養眞堂) 소개


풍산류씨(豊山柳氏)는 풍산현(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의 토성으로 고려 후기에 성장한 전형적인 재지사족이다. 시조인 류절(柳節)로부터 류돈승(柳敦升), 류정장(柳挺莊) 3대에 걸쳐 호장을 역임하였다. 4세인 류백(柳伯)의 은사급제로 토대를 마련하였고, 5세인 류난옥(柳蘭玉)이 창평현령을 역임함으로써 그 토대를 다졌다. 뒤를 이어 6세 류보(柳葆), 7세 류종혜(柳從惠)가 잇달아 실직을 역임함으로써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특히 류종혜 때부터 풍산 읍내에서 하회로 옮겨와 정착하여 하회는 풍산류씨 가문의 세거지가 되었다. 풍산에 살던 류종혜가 서쪽으로 10여 리를 옮겨 하회로 들어오고자 할 때 입향이 쉽지 않았던 것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류종혜의 조부인 류난옥이 먼저 하회에 입향하고자 했으나 적선을 한 뒤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계시에 따라 류종혜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음덕을 쌓았다는 전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류종혜가 3년 동안 만인에게 적선을 하고 나서야 입향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하회로 옮겨온 풍산류씨는 사회·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일족의 세력은 확대되었고 가세는 더욱 부유해졌다. 류종혜의 아들 류홍(柳洪)은 진사 김관(金琯)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김관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부친이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조부이다. 그러므로 류홍은 김숙자와 처남 매부 간이고 김종직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류홍의 아들 류소(柳沼) 권옹(權雍)의 사위가 되었는데, 권옹은 이조정랑 배소(裵素)의 사위이며 평창군사를 지낸 관료였다. 류소의 아들 류자온(柳子溫)은 사간 안팽명(安彭年)에게 글을 배우고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의 장인은 청백리로 유명한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으로 연산군 때 대사간을 지내다가 낙향하여 안동 풍산에 은거한 명사이다. 류자온의 아들 류공작(柳公綽)은 간성군수를 지냈으며 연안이씨(延安李氏) 이형례(李亨禮)의 사위였다. 이형례는 대제학을 지낸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의 조부이다. 이와 같이 류종혜로부터 류공작에 이르기까지 하회 류씨들은 조선 전기 영남 지역이라는 제한된 시공간에서 가능한 최정상급 혼맥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혼맥이 결국 류씨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고, 16세기에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 1515~1573), 겸암 류운룡·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부자를 출현시킴으로써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하였다.

류운룡의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부친은 입암 류중영, 모친은 안동김씨(安東金氏) 김광수(金光粹)의 딸이다. 서애 류성룡의 형이자 퇴계 이황의 제자로 어려서부터 독서를 시작하여 『소학』과 사서에 통달하였고 경사와 제자백가를 두루 익혔다. 어린 나이에 도산의 퇴계를 찾아가 배움을 청한 그는 1567년(명종 22) 겸암정사를 지어 강학과 수양처로 삼았으며 이기설이나 사칠논변을 퇴계의 이기이원론에 근거를 두고 변증을 시도하였다. 1572년(선조 5) 음사로 전함사별좌가 된 뒤 의금부도사, 진보현감 등을 역임하였고 1584년(선조 17) 인동현감에 제수되었을 때 법령을 정비하고 모든 토전, 민호, 세공 등의 양식을 만들어 균일하게 적용하여 편리해지자 관찰사가 그 법을 다른 고을에도 시행하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이 일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1592년(선조 25) 풍기가군수가 되었으며 전란의 어려움에도 조공을 평상시와 같이 하여 얼마 뒤 다시 정군수가 되었다. 이후 원주목사로 승진했으나 어버이의 노쇠함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으로 대부인을 모시고 봉화로 피난하였고 7년에 걸친 오랜 전란이 끝나자 피난 생활을 끝내고 하회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병을 얻어 1601년(선조 34) 세상을 떠나니 향년 63세였다. 임진왜란 때 세운 공으로 광국원종훈의 훈작을 받았으며 사후 이조판서의 증직과 문경공 시호를 받았다. 양진당에 불천위로 제향되며 풍기 우곡서원과 안동의 화천서원에 제향되었다.

보물 제306호로 지정된 양진당은 풍산류씨 대종가로, 충효당과 함께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사랑채에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류운룡의 부친 입암 류중영의 호를 따서 게시하였다. 그래서 양진당을 입암고택이라 부르기도 한다. 원래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 류종혜가 입향 당시 처음 자리 잡은 곳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말았다. 류종혜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선주민의 주거지를 피한 결과이다.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취락 입지를 고려한다면 화산 자락이 되어야 할 터이지만, 허씨가 이미 화산 남쪽 자락에 살고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안씨가 화산 북쪽 자락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류씨는 화천이 돌아 흐르는 하회의 중앙부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류운룡이 서쪽에 안채를 짓고, 그의 아들 류원직(柳元直)이 동쪽에 사랑채와 익랑 등을 지었다. 그의 증손 류세철(柳世哲)에 이르러 대문간, 마구간, 솟을대문간채 등이 증축되었다. 따라서 양진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래로 류운룡, 류원직, 류세철 등 4대에 걸쳐 중수와 개축을 이루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의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ㅁ자형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를 一자 형으로 배치하였다. 오른편 북쪽에는 2개의 사당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의 불천위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의 불천위 사당이다.

참고문헌
  • 정진영, 「안동 양진당」, 디지털안동문화대전.
  • 김주부, 「화천서원」, 『안동의 서원』, 안동청년유도회, 2016.
  • 이금도·김순일, 「하회 양진당의 중수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대한건축학회, 1995.
  • 이세동, 『충효당 높은 마루, 안동 서애 류성룡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