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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수당(醉睡堂)

함양오씨 취수당파종중(咸陽吳氏 醉睡堂派宗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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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취수당(醉睡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2.5x86.0x4.8
  • 건물명 취수당(醉睡堂)
  • 공간명 함양오씨 취수당파종중(咸陽吳氏 醉睡堂派宗中)
  • 서예가
  • 위치정보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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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수당(醉睡堂)

취수당(醉睡堂)


취수당(醉睡堂)은 오연(吳演, 1598~1669)이 1640년경에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에 건립한 건물의 당호 편액이다.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 1729~1803)가 지은 기문에 의하면 “당호를 지은 사람은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1598~1669)인데, ‘취수(醉睡)’라고 한 까닭은 오연이 명나라가 멸망한 시국을 개탄하며 ‘말술을 마셔 흠뻑 취하고, 취하면 잠들며, 잠들면 코를 고는데 숨소리가 우레와 같다.[轟飮大醉 醉輒睡 睡則鼾息如雷]’라고 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글씨는 김시온이 쓴 해서체로 전해진다.

편액의 글씨는 아주 단아하고 조용하다. 시작과 마무리 모든 필획에서 붓끝을 감추어 필획 속에서 마무리하여 절제하였다. 외형은 모가 없이 둥글고 부드럽지만 내면은 강철 같은 굳센 골기가 있어 외유내강의 풍모가 있다. 편액이 크지 않은데도 글씨는 더 작다. 따라서 글씨에 비해 편액 공간을 크게 만들었다. 그러나 큰 공간이 허전하지 않고 의미 있게 보인다. 바로 글씨가 가진 골기의 에너지가 이와 같이 굳세기 때문이라 보인다. 인적이 없는 고요한 숲속에 들어 명상에 잠긴 듯한 공간이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함양오씨 취수당파종중(咸陽吳氏 醉睡堂派宗中) 소개


취수당이 있는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는 동쪽으로 영양읍으로 들어가는 큰골이 있으며, 동북으로는 함박산이 솟아 있다. 서북으로는 장갈령재가 예안과 경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으로는 일월산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의 원줄기인 청계천이 흐르고 있다. 북으로 사인대산이 솟아 있어 사방이 산에 둘러싸여 천옥(天獄), 즉 자연이 만든 감옥이라고 부른다. 청기리는 1550년 후반에 안동 내앞 마을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고 학교를 세워 영양지역의 문풍 혁신에 공이 큰 청계(靑溪) 김진(金璡)이 거처한 곳이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자처하며 대명의리(大明義理)를 간직한 표은 김시온과 우재(愚齋) 오익(吳瀷, 1591∼1671), 취수당 오연등의 자취가 느껴지는 돈간재(敦艮齋), 청계정(靑溪亭), 취수당(醉睡堂) 등이 있다.

이 마을은 크게 건너마(월촌 越村), 군막구(軍幕丘), 정자마을, 정자촌, 조핏골, 초동, 진들, 장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너마는 마을 앞에 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 마을이 있는 곳인데, 동북간으로는 갓등산이 솟아 있고 동쪽에는 큰골이 있으며 함박산과 왕재 등이 영양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본래 앞내를 건너야 마을이 있다하여 ‘건너마’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군막구는 효종 대의 청나라에 대한 북벌계획과 이 지방 유림과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취수당 앞의 개울 건너에 있는 작은 구릉이었는데, 지금은 밭으로 쓴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북벌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 마을에는 국력 배양을 위한 민간인 군사조직을 기르고 있었다. 이때 오연이 김시온과 함께 창석(蒼石) 이준(李埈),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오익의 도움으로 취수당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병서를 강론하고 말 타고 활 쏘고 칼을 쓰는 법을 병사들에게 익히게 하였다. 이 언덕에다 훈련병 막사를 짓고 마구간을 지었으므로 군막구라고 한다. 청계 김진이 우거한 마을이 있는 뒷산에 옛날부터 조피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베어다 집을 짓고 살았다. 그래서 이 마을의 명칭은 조피나무가 많은 골짜기라 하여 조핏골, 조피골이라 불리고 있다.

함양오씨(咸陽吳氏)의 시조는 고려 명종 때 함양부원군에 봉해진 오광휘(吳光輝)이다. 오연의 상조(上祖)는 오현필(吳賢弼)이다. 증조부는 오필(吳滭), 조부는 오민수(吳敏壽)이다. 부친 오극성(吳克成)은 정유재란 때 세운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올랐다. 관직에서 물러나 1601년 영양읍 대천에 문월당(問月堂)을 지어 은거했다. 모친은 평해황씨(平海黃氏) 황승백(黃勝白)의 딸이고, 용계(龍溪) 오흡(吳潝, 1576∼1641)이 오연의 형이다. 오연은 영양 대천에서 태어났다. 오연의 자는 덕원(德源), 호는 취수당,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9세 때 함정을 설치해 호랑이를 잡으니 사람들은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1634년 선략장군·충무위 부사과 정략장군·충무위 부사용을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영남의 관찰사의 추천으로 쌍령의 전투에 참여했는데, 전세가 이미 기울어진 상태에서도 포위망을 뚫고 오랑캐의 추장 두 명을 죽이고 말을 빼앗아 타고 돌아왔다. 결국 남한산성의 비보를 듣고 통곡하면서 칼을 버리고 영양 대천으로 돌아와서 사명단(思明壇)을 쌓고 수시로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며 지냈다. 당시 김시온(金是榲)과 이시명(李時明)은 모두 산림의 원로로서 절개가 굳은 선비였는데 명나라가 망하자 세상을 등지고 절개를 지키고 있었다. 오연은 특히 김시온과의 친분이 두터웠는데, 김시온은 병자호란 이후 증조부 김진이 있었던 청기리의 흥림초사(興林草舍)를 중건해 돈간재(敦艮齋)라고 편액하고 머물고 있었다. 김시온은 돈간재 동북쪽 초동언덕에 집을 지어 절반을 오연에게 주면서 취수당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것이 오연이 영양 청기리에서 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오연의 부인은 대흥백씨(大興白氏) 백영수(白英壽)의 딸이다. 아들은 오이흥(吳以興)과 오이극(吳以極)이다. 묘소는 영양군 산운산 오좌 언덕에 있다.

취수당은 건립 당시의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오씨 문중에서 “1640년 전후로 해서 지어졌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후 정자는 1799년에 중수되었다. 취수당은 전면 좌측의 사각문을 통하여 들 수 있으며, 대지는 동서축으로 약간의 경사를 두었다. 산을 등지고 정남향으로 자리하는데, 건물의 배치는 크게 2개 영역으로 구분된다. 취수당이 경사지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대지를 2단으로 조성하였다. 취수당은 기단에 층을 둔 중층누각형 건물이다. 마루의 하부는 1단의 기단을 설치한 뒤 누하주를 세워 중층의 모양을 내었다. 온돌방 부분은 3단으로 기단을 설치하여 출입이 쉽도록 하였다. 평면 구성은 좌측 4칸에 걸쳐 마루를 내고 사방으로 문을 설치하여 폐쇄형의 구조를 이뤘다. 우측 2칸은 온돌방으로 조성되었다. 방 천장은 회벽으로 마감된 고미반자를 설치하였고, 측면에 시렁을 설치해 두었다. 또한 장여 등 목부 모서리에 변탕을 친 세심한 마감기법도 지니고 있다. 취수당은 2002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0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오연吳演, 『醉睡堂文集』.
  • 조술도趙述道, 『晩谷集』, 「醉睡堂記」.
  • 영양군지편찬위원회, 『英陽郡志』, 영양군, 1998.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문화재청(http://search.ch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