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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당(操省堂)

의성김씨 한곡문중(義城金氏 寒谷門中)

46.5x105.3x8.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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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조성당(操省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6.5x105.3x8.5
  • 건물명 조성당(操省堂)
  • 공간명 의성김씨 한곡문중(義城金氏 寒谷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예안면 태곡리 한실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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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당(操省堂)

조성당(操省堂)


조성당(操省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태곡리 한실마을에 있는 한천정사(寒泉精舍)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조성’은 항상 마음을 잡고[操] 반성하고 되돌아본다[省]는 의미이다. 한천정사는 1786년(정조 10) 조성당(操省堂)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본래 제향하고 있던 한천사에 김택룡의 와운정을 옮겨지음으로써 설립되었다. ‘한천(寒泉)’은 자식들이 어버이를 잘못 섬긴 것을 자책한다는 뜻이 있다. 『시경詩經』, 「개풍편凱風篇」에 “맑은 샘물이 준(浚) 고을 아래 있네. 아들 일곱 사람이 있으나 어머님 노고하셨겠네.[爰有寒泉 在浚之下 有子七人 母氏勞苦]”라고 한 것에서 따왔다. 또한 주희(朱熹)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 가까이에 정사를 세우고 한천정사라고 하였는데, 이곳 덕현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택룡의 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덕현 바로 옆 마을인 한실마을 뒤 언덕에 정사를 세우면서 한천의 의미를 빌린 것이다.

조성당과 한천정사 모두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이며, 해서로 쓰였다. 굳건하면서도 경쾌하다. 속도감도 있다. 반듯하고 훤칠한 미남자를 대하는 듯 상쾌하다. 법과 규칙이 뚜렷하여 반복적이라 하더라도 원칙에 충실하여 반복하고 있다. 우직하다. 가끔 우리는 답이 없어 보이는 과제에 평생을 거는 일이 답답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때론 그런 사람이 그립다. 지금 시절에 더 그리운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고법과 원칙이 이미 몸에 밴 한 선비가 성찰을 멈추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편액을 달았다. 당시 선비의 한 모습이 편액 위에 겹쳐진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의성김씨 한곡문중(義城金氏 寒谷門中) 소개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태곡리는 마을 뒤쪽에 태봉이 있어 탯골, 태곡, 태동이라 하였다. 『선성지宣城誌』 서문에 “송나라 대중(大中)·천성(天聖) 연간인 현종 대는 길주에 속했으며 신우(辛禑)의 태(胎)를 현 동쪽에다 묻었다 하여 다시 군으로 만들었다가 조금 뒤 주로 승격하였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한 현 동쪽이 지금의 태곡이다. 태를 묻은 산은 지금도 태봉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예안군 동하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촌, 곡촌, 퇴산, 남산, 덕현과 동상면 인계동 일부를 통합하여 태곡리라 하고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와 통합되면서 안동시 예안면 태곡리가 되었다. 덕재[德峴], 물미[退山], 골마[金谷], 밭마[外村·寒室], 남산, 탯골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으며 밭마가 태곡리의 중심지이다. 덕재는 임진왜란 때 정난 일등공신에 책록된 조성당 김택룡이 출생하고 별세한 곳으로, 마을의 이름도 김택룡의 인품이 높고 덕이 많아 이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태곡리의 중심지를 이루는 마을로 골말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밖마, 밭마, 외촌, 탯말, 한실이라고 부르는 곳은 김택룡의 고조부 김효우(金孝友)가 입향하면서부터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이 마을 안에 한천정사가 있다.

김택룡은 자가 시보(施普), 호는 조성당(操省堂) 또는 와운자(臥雲子)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고조부인 김효우가 의성김씨 예안파 집성촌인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에서 예안 한곡(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태곡리)에 살 곳을 정한 이후 그곳에서 세거하였다. 조부는 김몽석(金夢石)이며 아버지는 김양진(金楊震)이다. 모친은 안동김씨(安東金氏) 김려광(金礪光)의 딸이다. 김택룡은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와 월천(月川) 조목(趙穆)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76년(선조 9)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88년(선조 21)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경릉참봉, 승문원저작,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임금을 뒤따랐고 접반배신으로 명나라 군대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606년(선조 39) 선무공신이등, 청난공신일등에 훈작된 그는 1608년(선조 41) 영월군수를 마지막으로 관력을 마쳤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폄훼하는 내용으로 상차(上箚)하자 도내에 통문을 돌려 도산서원에 유생들을 모아 변무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고, 조목의 사후에는 그를 도산서원에 종향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초취부인은 고양이씨(高陽李氏) 이사의(李思義)의 딸이고, 후취부인은 진성이씨(眞城李氏) 이의강(李義綱)의 딸이다. 5남 6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숙(金琡), 김적(金玓), 김각(金瑴), 김영(金瑛), 김박(金珀)이고 사위는 김학(金翯), 김광찬(金光纘), 장세언(張世彦), 권근오(權謹吾), 김일신(金日新), 남효각(南孝慤)이다. 저술로 4권 2책의 『조성당집操省堂集』과 3권의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가 있다.

한천정사는 토석담을 두르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5량 가구이다.

참고문헌
  • 김택룡, 『조성당집』.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명현당호』, 안동민속박물관, 2000.
  • 김택룡 저, 하영휘 역, 『국역 조성당일기』, 한국국학진흥원, 2010.
  • 윤성훈, 「『조성당일기』를 통해 본 17세기 초 영남 사족의 일상 속의 문화생활」, 『한문학논집』 제35집, 근역한문학회, 2012.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hyunpan/)
  • 디지털안동문화대전(http://andong.grandcultur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