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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재(定止齋)

광산김씨 정지재(光山金氏 定止齋)

51.4x114.2x10.6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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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정지재(定止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1.4x114.2x10.6
  • 건물명 정지재(定止齋)
  • 공간명 광산김씨 정지재(光山金氏 定止齋)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어름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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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재(定止齋)

정지재(定止齋)


정지재(定止齋)는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남쪽 어름산 아래에 자리한 정지재(定止齋) 김확(金確, 1583~1665)이 거처했던 집의 당호이다. ‘정지’는 『대학』의 “그칠 데를 안 뒤에 정함이 있다.[知止而后有定]”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김확은 예안에 살았는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이미 조정이 청나라와 화친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어름산 아래에 정지재를 짓고 은거하였다. 김확에게 있어서 ‘그칠 곳[止]’이란 국난의 시기에는 신민(臣民)으로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힘을 다하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는 자신의 지향을 간직하며 은거하는 것이었다.

편액 글씨는 해서로 쓰였다. 억새고 투박하다. 그러나 위압적이지 않고 오히려 소박한 원형질의 맛이 있다. 필세의 투박함은 처음과 마무리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때로는 이렇게 별 생각 없이 과감하게 내지르는 듯 역입 필세가 감동을 준다. 거친 듯한 필획이 우선 크게 보이지만 여기에 비해 세 글자 구성은 세련된 소밀관계가 있다. 가운데 止는 성글게 배치하였지만 우뚝 선 당당함으로 좌우의 넉넉한 공간을 자신의 소속으로 지배하고 있다. 定 과 齋는 긴밀하게 배치하여 기세를 가운데로 몰아주는 튼튼한 벽을 만든 형세다. 운(韻)이란 이 편액의 중앙부와 같이 성글어 빈 곳에서 생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광산김씨 정지재(光山金氏 定止齋) 소개


김확이 생장한 오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읍내면 지역으로 외내, 오천(烏川)이라 하였다. 외내는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가 ‘한줄기로 맑은 개울’이었다는 의미이다. 혹은 물이 맑을 때 물 밑에 깔린 돌을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하여 오천이라 한다. 1914년 무양동 일부와 안동군 북선면의 외감애동 일부, 동후면의 나소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천동·오천리라 하여 예안면에 편입되었다가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오천리는 3개 리로 구분되어 있다. 오천 1리는 군자리와 방잠의 일부, 오천 2리는 조마리, 이사, 우무실마을이고, 오천 3리는 양정, 신역, 당고개, 지삼마을로 되어 있다. 군자리는 근래에 조성된 광산김씨오천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광산김씨 예안파의 600년 전통 마을이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자 2km 위인 현 위치로 종택, 묘우, 정자, 강당 등의 중요 건물들만 이건하였다. 김확이 정자를 짓고 은거한 어름산은 부라촌(浮羅村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에 있는 산으로 부라촌의 남쪽에 있어서 남산으로도 부른다.

광산김씨는 원래 전라도 광산에서 고려 후기에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그 한 파가 경상도 안동으로 와서 풍천의 구담, 와룡의 가구, 예안의 오천 등 세 곳에 뿌리를 내렸다. 오천의 입향 시조는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54~1534)로 풍산 도양골에 살다가 연산군 때 이곳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그의 아들 운암(雲巖) 김연(金緣, 1487~1544)과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91~1555)는 중종 때 명신으로 가문이 융성해지는 데 기틀을 마련하였다. 군자리로 불리게 된 것은 안동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오천마을은 주민들 모두가 군자 아닌 사람이 없구나.”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특히 오천칠군자는 김연의 아들인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 김유의 아들인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김효로의 외손인 봉화금씨(奉化琴氏)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 등의 7인을 가리키는 말로, 모두 김효로의 친손과 외손들이다.

김확은 자가 이실(而實), 호는 정지재,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조부는 김부인이고, 부친은 김광찬(金光纘, 1564~?)이다. 모친 횡성조씨(橫城趙氏)는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딸이다. 김확은 당숙인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에게 수학하였고, 1603년(선조 36)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천거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미 조정이 청나라와 화친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향으로 돌아온 후 예안의 어름산 아래에 정지재를 짓고 은거하였다.

참고문헌
  • 정온鄭蘊, 「월천조목선생신도비명 병서月川趙先生神道碑銘 幷序」, 『동계집桐溪集』.
  • 이이순李頤淳, 「남산기南山記」, 『후계집後溪集』.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명현당호』, 안동민속박물관, 2000.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hyun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