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졸당(養拙堂)
양졸당(養拙堂)은 경주이씨(慶州李氏) 호계(虎溪) 이을규(李乙奎, 1508~1546)의 당호 편액이다. ‘양졸’은 관직에 대해 성급하게 여기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물러나 자신의 천성[拙]을 기르고[養] 절개를 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편액을 걸어 둔 곳이 정확하지 않으나 양졸당은 이을규의 또 다른 호인 만큼 그의 집 사랑채의 당호로 짐작된다. 편액 글씨는 해서로 되어 있다.
경주이씨 호계문중(慶州李氏 虎溪門中) 소개
이을규가 낙향해 머물었던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호명리는 산이 끊어져 갈 곳이 없어진 범이 슬피 울었다고 하여 범우리, 범어리 또는 호명이라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승삼마을(지금의 경주시 용강동)에는 승려로 변한 세 마리의 범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을 자주 해치곤 하였다. 두려움에 떨던 주민들은 합심하여 범을 몰아내기로 했다. 어느 날 일제히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 범을 쫓았다. 도망가던 범이 호명에 이르렀으나 형산강으로 산이 끊어지고 더 이상 도망갈 때가 없자 슬피 울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고려 현종 때 경주부윤으로 있던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승삼에 여승으로 변한 호랑이 세 마리가 사람을 해친다는 소문을 듣고 범을 잡으려고 하자, 범이 도망가다가 지금의 호명 앞산에 이르니 산이 끊어져 갈 곳이 없으므로 슬피 울었다고 한다. 호명리는 본래 안강현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강동면 호명리로 되었다. 호명은 경주에서 7번 국도로 포항으로 가다가 모서에 이어서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다.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안강 갑산리와 안강리, 양동마을과도 맞닿아있다. 형산강을 끼고 있는 이 마을은 넓은 들판과 풍부한 물이 있어 일찍이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져 왔다. 옛날부터 ‘일사방이호명’이라고 했을 정도다. 이곳에는 경주이씨(慶州李氏), 광주안씨(廣州安氏), 달성서씨(達城徐氏)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을규의 자는 문경(文卿), 호는 호계(虎溪) 또는 양졸당(養拙堂)이다. 경주이씨의 시조는 이알평(李謁平)이며, 이알평의 50세손인 판전공(判典公) 이강(李▼耒+羽)의 7세손이다. 부친은 이한주(李漢柱)이고, 모친은 조계량(曺繼亮)의 딸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에게 수학하였다. 153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35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형조좌랑, 승문원교리, 경산현령, 초계군수 등을 지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537년(중종 30) 사은사 겸 진하사 남세웅(南世雄)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것을 비롯하여 모두 3차에 걸친 중국사행을 수행하였다. 1543년 경주 강동면 호명으로 낙향하였다. 부인은 축산전씨(竺山全氏) 전회옥(全懷玉)의 딸이다. 5남을 낳았는데, 이홍검, 이홍정(李弘淨), 이홍각(李弘愨), 이홍로(李弘魯), 이홍순(李弘醇)이다. 묘소는 경주 북군 화개산에 있다. 저술로 『호계선생일고虎溪先生逸稿』가 있다. 이을교(李乙奎)를 향사하는 북산서사는 북호산 자락에 위치하여 향사 공간인 지경묘와 강학 공간인 포요당이 있다. 이 서사는 본래 1830년 경주 북군동에 북산사로 창건되었는데, 1868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고 1967년 호명리의 호계정사가 있던 자리에 복원되었다. 3칸의 대문은 공심문(共尋門)이라는 현판이 있다. 강당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가운데 2칸의 대청이 있고 그 양 옆에 각 한 칸씩 방을 두고 있다. 사당은 정면 2칸, 측면 1칸이다. 이정병(李鼎秉)의 「북산서사기北山書社記」에서 북산서사는 북산사의 터 앞에 3칸의 강당을 두고 그 좌우에 2칸씩의 서재를 두었다고 하였다. 또 각 건물의 명칭은 사당은 지경묘, 강당은 포요당, 동재는 심득재, 서재는 의중재, 대문은 공심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각 이름은 바로 이을규의 스승인 이언적이 이을규에게 준 시에서 따온 용어들이다.
서울로 가는 진사 이을규를 전송하다깊은 봄날 머리 돌려 푸른 강물 바라보니넓은 강이 대자연과 더불어서 흐르누나만물이 때를 만나 모두 절로 즐거운데일신이 분수대로 사니 또한 근심 없네온아하고 재주 있는 그댈 사랑하거니와노쇠하여 머리 허연 내 모습이 부끄럽네알아주는 사람 없어 거문고 홀로 타니이별하면 그 누가 함께 이곳을 찾아올까성균관에 돌아가서 선사를 배알하면충경으로 몸을 잘 지켜 가야 하리라높은 벼슬 부질없고 도의가 중하나니깨닫기를 구할 뿐 알려지려 하지 말길
送李進士乙奎向洛春深回首碧江頭浩氣聊同大化流萬物得時皆自樂一身隨分亦無憂愛君溫雅才超衆愧我摧頹鬢滿秋獨抱瑤琴相識少別來誰與共尋幽君歸遊泮謁先師忠敬應須好自持軒冕如雲道義重只求心得不求知
즉 사당인 지경묘는 “충경으로 몸을 잘 지켜 가야 하리라.[忠敬應須好自持]”에서 충경(忠敬)의 마음으로 몸가짐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이며, 강당인 포요당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던 이을규를 떠나보낸 쓸쓸함을 표현한 “알아주는 사람 없어 거문고 홀로 타네.[獨抱瑤琴相識少]”에서 가져온 말이다. 대문인 공심문은 “이별하면 누가 함께 이곳을 찾아올까.[別來誰與共尋幽]”에서 따온 말이다. 동재인 심득재는 “깨닫기를 구할 뿐 알려지려 하지 말길.[只求心得不求知]”에서, 서재인 의중재는 “높은 벼슬 부질없고 도의가 중하나니.[軒冕如雲道義重]”에서 가져온 말로 모두 이을규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데 남에게 알려져 현달해질 것을 바라지 말고 도의를 중시하며 학문에 전념할 것을 당부한 이언적의 말이다. 북산서사는 2013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13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이정병(李鼎秉), 『금파집(琴坡集)』, 「北山書社記」.
- 이언적(李彦迪), 『회재집(晦齋集)』, 「送李進士乙奎向洛」.
- 정간(鄭榦), 『명고집(鳴臯集)』, 「通仕郞行省峴道察訪李公墓碣銘」.
- 문화재청(http://www.cha.go.kr/)
- 경주 강동면사무소(http://www.gyeongju.go.kr/village/gangd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