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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암정려(雙巖精廬)

진주강씨 국전공파(晉州姜氏 菊田公派)

48.3x126.0x6.8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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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쌍암정려(雙巖精廬)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8.3x126.0x6.8
  • 건물명 쌍암정려(雙巖精廬)
  • 공간명 진주강씨 국전공파(晉州姜氏 菊田公派)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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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암정려(雙巖精廬)

쌍암정려(雙巖精廬)


쌍암정려(雙巖精廬)는 국전(菊田) 강형수(姜馨秀, 1875~1942)가 1927년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에 건립한 정자의 편액이다. ‘쌍암’은 한 쌍의 바위라는 말로, 정자 뒤의 거북 바위와 용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데에서 취하였다. 글씨는 소우(素愚) 강벽원(姜壁元, 1859-1941)이 쓴 해서체이다.

굳세고 두터운 필획이 시원하고 힘찬 글씨다. 정해진 편액 공간에 네 글자를 써 넣고도 두터운 필획이 그침 없이 활달하다. 필획이 많은 복잡한 글자임에도 구성이 치밀하고 기세의 상호 흐름이 원활하다. 글자 내부는 긴밀하고 외부 자간 관계는 균정하다. 탁월한 화면 운용으로 화면 가득한 울림을 만들고 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진주강씨 국전공파(晉州姜氏 菊田公派) 소개


강형수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건일(建一), 호는 국전이다. 오암 강영숙, 지포 강건수에게 한학과 한의학을 배웠다. 29세 때인 1903년에 관리서주사를 제수받았으며, 40세에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교육에 있음을 직시하고 사익재에서 용전학술강습회를 창립하였다. 52세에는 간석대를 만들었고, 이듬해에 쌍암정을 지었다. 저서로는 『국전유고菊田遺稿』 4권 2책이 있다. 금서(錦西) 김규환(金奎煥)이 읊은 「쌍암정雙巖精」 시가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두 바위를 좋아해서 지은 정자는
진실로 주인이 책 읽기에 알맞네
새로 물길 난 곳에는 삼상이 푸르고
텅 빈 땅의 원림에는 잎이 무성하네
높다란 두문령은 그림을 그린 듯하고
깨끗한 옥계천은 마음 씻기 그만이네
이 속의 참다운 흥취 그 누가 알랴
덧없는 세상에 살고 있음이 우습구나

爲愛雙巖架一亭
主人亶合讀黃庭
新潮世界三桑碧
隙地園林一葉靑
斗嶺崢嶸當面畵
玉泉甘潔洗心醒
這間眞趣那能識
笑殺浮生摠投形

진주강씨(晉州姜氏) 집성촌인 옹천리는 마을 북서쪽으로 높은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싸인 형상이 단지와 비슷하다고 하여 옹전(瓮田), 마을을 가로지르는 옥계천이 맑고 깨끗하여 옥천(玉川)이라 하였는데, 이후 마을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다고 하여 ‘옹(瓮)’자와 ‘천(泉)’자를 붙여 옹천(瓮泉)이라고 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 입향조 강시(姜蓍)가 성균시에 급제하여 안동대도호부사로 부임한 인연으로 강시의 아들 5형제가 고려가 망할 때 벼슬을 사직하고 안동과 봉화(지금의 봉화군 법전면) 등지로 낙향하였다. 장남 강회백(姜淮伯)은 안동 북후면에 자리를 잡았고, 강회백의 아들 강종덕(姜宗德)은 예천 감천으로 옮겨 살았다. 이후 강종덕의 증손자 강두전(姜斗全)이 옹천에 터를 잡으면서 집성촌이 이루어졌다. 마을 북서쪽으로 두문령 고개가 있고, 옥계천이 마을을 가로질러 흐른다. 북쪽으로는 금계산이 솟아 있고, 4㎞의 철로가 놓인 금계굴이 금계산을 관통하여 영주시 평은면으로 이어진다. 옹천리는 옹천 1리의 본마·감상골·굴로골·밤실·새마·토골, 옹천2리의 본마·원구렁, 온천3리의 본마·시장·한지골·오누골·개평·관사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옹천리에 거주하는 총 500가구 가운데 약 260개 가구가 진주강씨다. 관련 유적으로는 강봉문(姜鳳文)이 후학을 양성하던 사익재, 강형수가 세운 쌍암정이 있다.

강형수가 쌍암정을 짓게 된 경위는 권상익이 지은 「쌍암정사기雙巖亭史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어 소개한다. 강형수가 쌍암 위에 정자를 지어 놓고 쌍암정려라 명명하고는 자랑하여 말하기를 “내가 사는 곳은 영가의 큰 고을이다. 인가는 즐비하고 울타리는 서솔 이어져 삼사백호가가 되는데 성시(城市)를 끼고 관도(官途)가 통하여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곡하는 소리, 소 모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수레의 먼지, 말발굽 소리, 앞뒤 분간도 못할 만큼 취하여 거꾸로 실려 가면서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 등 그 분잡함을 감당치 못한다. 여름철 장마나 찌는 듯한 무더위를 당해서는 확 트이고 시원한 정취를 볼 수가 없고, 바람과 눈으로 두문불출할 경우엔 눈이 어지럽고 귀가 고단하여 문득 배우고 지켜 나가는 맛을 잊어버리곤 한다. 또한 내가 소시부터 시서(詩書)를 업으로 삼아 다행히도 대충 의술을 섭렵했거니와 나를 찾아오는 자가 종일 문전에 이르기에 나는 매우 괴로워 이런 환경을 구한 것이다. 지세는 높지 않으나 앞이 확 트이고, 산은 깊지 않으나 그윽하고 고요하며 산골의 물소리가 들리고 수풀 바람 소리가 메아리치며 매미는 노래하고 새들이 지저귀니 이전의 시끄러움이 없다. 이내의 빛과 암석의 기운과 구름의 모습과 물빛도 이전의 잡다한 것이 없다. 우리 일가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 수백 년이 되었으나 한 사람도 이런 좋은 환경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나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것은 아마 하늘이 내린 듯하다. 나는 노년을 이곳에서 휴식하면서 지내고 싶다.”고 하였다.

쌍암정려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기와집이다. 좌측에는 온돌방을 배치하고 우측에는 마루를 배치하였는데, 삼면에 판벽과 관문을 달아 마루방으로 꾸몄다. 시멘트로 만든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웠다. 정자 내부에는 김흥락과 김제면이 지은 「쌍암정려기雙巖精廬記」와 권상익이 지은 「쌍암정사기」가 걸려 있다.

참고문헌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Ⅰ, Ⅱ, 2009.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Ⅱ,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