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구려(陽坡舊廬)
양파구려(陽坡舊廬)는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 있는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의 옛 집으로, 고손(高孫)인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이 편액을 걸었다. 원래 임하 수곡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이곳으로 이건하였으며 현재 문화재자료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양파’는 류관현의 호이다.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 1724∼1796)이 저술한 「유사遺事」에 의하면 “류관현은 평소 당호를 세우지 않았으며, 시나 간찰에 ‘양파’라고 쓴 것은 살고 있는 마을이 ‘양파’이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 예서체이다.
전주류씨 정재종택(全州柳氏 定齋宗宅) 소개
류관현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용빈(用賓), 호는 양파(陽坡)이다. 증조부는 휘가 숙(橚)으로 벼슬이 부호군, 조부는 휘가 진휘(振輝)로 성균관 진사이다. 아버지는 휘가 봉시(奉時)로 인륜을 돈독히 하고 의리를 좋아하여 종당(宗黨)에서 존중받았다. 어머니 아주신씨(鵝洲申氏)는 통덕랑 신이징(申以徵)의 딸이다. 백씨(伯氏)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에게 수학하였으며, 1735년(영조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백씨 류승현이 외직으로 나갔다가 죽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1753년 경성판관에 등용되어 사간·필선 등을 역임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뒤에 장령과 형조참의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경성판관으로 있을 때 초하루와 보름의 점고에 빠진 남정(男丁)들로부터 받는 세금과 무세(巫稅)로 바치는 포(布)를 감면해주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으며, 흉년에 1,000여석의 양곡으로 기민(飢民)을 구제하여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지은 『목민심서』에 치적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사도세자의 시강관으로 있을 때 「역도촬요易圖撮要」를 만들어 세자에게 『주역』을 가르쳤다. 신유년(1741)과 임술년(1742)의 기근에 모든 친척들이 굶주려 신음하고 있었는데, 집 한쪽에 있는 밭에 보리가 먼저 익자, 가까운 친척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푸른 보리 이삭을 꺾어 먹도록 하여 급한 상황을 면하게 하고, 다른 집 여종들에게도 날마다 광주리를 가지고 자기 밭처럼 가서 꺾어 가도록 하여 사람들이 그 밭을 ‘의전(義田)’이라고 불렀다. 집안의 여러 사람을 다스리는 데는 온화하면서도 절도가 있었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은혜로웠다. 자제들이 혹시라도 남의 잘못을 말하면 바로 꾸짖으면서 “너의 행실에는 과연 잘못이 전혀 없느냐? 저 사람 역시 너의 잘못을 따질 것이니, 쓸데없이 남을 책망하면서 스스로 돌아보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혹시라도 말이 재물과 이익에 미치게 되면, 그때마다 타이르기를 “천하에 다스리기 어려운 일로는 이욕만 한 것이 없다. 내가 스무 살이 되기까지는 돈과 곡식이 무엇인지도 몰랐는데, 후에 어려움을 당하고 집이 가난하게 되어 살림에 마음을 두게 되자 이익을 좇는 마음이 날로 자랐다. 그래서 때때로 경계하고 반성하였으며, 매번 이욕이 분수를 크게 넘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류관현의 총명은 나이가 들어도 줄어들지 않아 젊었을 때 읽은 것을 만년에도 종종 여러 아들에게 외워서 들려주었다. 아들들이 한유(韓愈)의 시를 암송하면서 빼먹은 부분이 많았는데, 탄식하며 “너희의 총명이 이러하니 어떻게 학업을 이루겠는가?”라고 하면서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다 외웠다. 춘방(春坊)에서 당직할 때, 『자치통감강목』을 임금 앞에 나아가 강론하였는데, 한 궁료(宮僚)가 자기 차례가 될 때마다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이때 곧바로 여러 쪽을 암송하니, 그 사람이 “어르신이 이렇게 권수가 많은 책을 해독하는 것이 어찌 이처럼 완숙한가.”하고 경탄하였다. 가문에 대대로 전해오는 『가세영언家世零言』에는 집안의 소소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양파공은 근검하여 벼슬이 높아 귀하게 되었어도 하인이 하는 일을 직접 하였다. 하루는 임금의 명을 받아 역마를 타고 집을 나섰다가 도중에 말을 돌려 집으로 돌아와서 부엌의 재를 치우고 바닥에 흙을 깔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때 서리(胥吏)가 그 이유를 묻자 ‘어릴 때부터 매일 흙을 파서 부엌에 깔고 이튿날 끌어내어 다시 까는 것이 나의 일과인데 오늘은 내가 벼슬길을 떠난다고 마음이 잠시 해이재서 잊어버렸다.’라고 하였다.전주류씨 무실파는 시조 류습(柳濕)의 후손으로, 6세손 류윤선(柳潤善, 1500~1557)이 세거지인 서울 묵사동에서 처가인 영주(榮州)로 이거하였고, 장남 류성(柳城, 1533~1560)이 안동 천전리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사위가 되면서 영주에서 무실로 이거하여 이곳에 터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조선 후기까지 학문‧덕행‧충효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문집을 남긴 인물만 120여 명에 이른다. 불천위(不遷位)가 5명(백졸암 류직, 용와 류승현, 삼산 류정원, 호고와 류휘문, 정재 류치명), 문과급제자가 10명, 무과급제제가 5명, 생원진사 33명, 음사로 벼슬한 인물이 39명이었다. 특히 류경시(柳敬時)와 류승현(柳升鉉)은 청백리에 선정되었고 류관현과 류정원은 『목민심서』에 수록될 만큼 치적이 있었다. 류성은 류복기(柳復起)와 류복립(柳復立) 두 아들을 두었는데, 류복기는 학봉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류복기는 우잠(友潛)‧득잠(得潛)‧지잠(知潛)‧수잠(守潛)‧의잠(宜潛)‧희잠(希潛)‧시잠(時潛) 등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류우잠의 증손인 류봉시(柳奉時, 1654~1709)가 무실에서 분가하여 근처 위동에 터전을 잡았으며 그의 두 아들인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과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 1692∼1764)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함에 따라 재지기반이 확고해졌다. 류승현은 박실[朴谷]에 터를 잡아 박실의 파조가 되었고, 류관현은 한들[大坪]에 터를 잡아 한들의 파조가 되었다. 류관현 이후의 세계는 류통원(柳通源) → 류성휴(柳星休) → 류회문(柳晦文) → 류치명으로 이어진다. 전주류씨 세거지였던 무실과 박실마을은 안동시 임동면에 위치해 있으며, 임동면은 원래 임하현에 속한 땅으로 1895년 임동면으로 명칭을 바꾸어 안동군에 편입되었다. 지명은 임하(臨河)의 동쪽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1914년 3개의 동리가 분리되어 임하면이 되었다. 이후 1974년 일부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으며 1995년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아기산의 지맥을 등에 지고 임동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무실과 박실마을은 영남을 대표하는 반촌이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400여 년 동안 지켜온 삶의 터전이 물속에 잠기게 되어 부득이 1987년을 전후하여 이곳으로 이거하게 되었다. 정재종택은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이 1735년(영조 11) 창건한 집으로 양파구려라고도 한다. 임하댐 건설로 임동면 수곡에서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재종택은 대문채, 정침, 행랑채, 사당 등 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침은 口자형 평면으로 전면의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사랑방과 사랑마루, 갓사랑, 책방을 두었고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안방과 부엌, 찬방, 대청, 누마루, 상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채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좌측에 2칸 온돌방이 있고 우측에는 장마루 청판을 깐 2칸 고방이 설치되어 있다. 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3량가 맞배지붕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종택 뒤에는 또 류치명의 묘소도 있다. 정재종택은 원래 대평리에 있었고, 만우정은 사의리에 있었는데,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그 두 곳이 수몰 지역이 되어 여기 묘소가 있던 골짜기 안으로 다 이건하였다.
참고문헌- 柳致明, 「名堂室小說」 『定齋集 續集』 卷8
- 안동민속박물관, 『安東의 懸板』Ⅰ, Ⅱ, 2009.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Ⅱ, 2015.
- 한국국학진흥원자료부, 『전주류씨 정재고택』,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 33, 2016.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