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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재(壽靜齋)

전주류씨 박실웃댁 수정재고택(全州柳氏 朴谷上宅 壽靜齋古宅)

30.7x62.3x4.2 / 초서(草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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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수정재(壽靜齋)
  • 글자체 초서(草書)
  • 크기 30.7x62.3x4.2
  • 건물명 수정재(壽靜齋)
  • 공간명 전주류씨 박실웃댁 수정재고택(全州柳氏 朴谷上宅 壽靜齋古宅)
  • 서예가
  • 위치정보 구미시 해평 일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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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재(壽靜齋)

수정재(壽靜齋)


류정문(柳鼎文, 1782~1839)의 당호인 수정재(壽靜齋)는 소백산의 수정봉 소리를 옮긴 것으로 『논어』, 「옹야雍也」에서 공자의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니, 지혜로운 자는 동적이고 어진 자는 정적이며, 지혜로운 자는 즐겁게 살고 어진 자는 오래 산다.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는 글에서 가져온 말이다. 류정문은 그의 나이 47세인 1828년에 소백산을 유람하다가 바위틈에 수정산인(水晶山人)이라고 써 두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 1768∼1844)이 봉투에 수정(水晶)이라고 써서 편지를 보냈다. 이때 친구 송서(松西) 강운(江雲)이 부담스러워 하는 류정문에게 “어르신이 명명하심을 그대가 사양하지 못하는구나. 만약 어르신이 표시해 둔 수정이 싫으면 소리가 비슷한 수정(壽靜)으로 바꾸는 것이 어떤가?”라며 「수정재기壽靜齋記」를 지어 주었다. 류정문은 강운이 기문에서 자신의 타고난 자질이 연약하여 쉽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자신의 성격이 조급하여 움직임이 많은 것을 걱정하고 있음에 고마워하였다. 다만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인자(仁者)의 의미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여겼으나, 중국 송나라의 소동파가 식헌(息軒)에 대해서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앉았으면 하루가 이틀이 되는 셈이니 만약 70년을 산다면 140년을 사는 셈이 되리라. [無事此靜坐 一日是兩日 若活七十年 便是百四十]”라고 읊은 시가 해학적이면서도 수정(壽靜)의 뜻을 지니고 있으니 강운이 기문에서 언급한 내용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여 이때부터 수정산인(水晶山人)이라는 자신의 호를 수정재로 바꾸고, 당호를 수정재라고 편액하였다. 편액 글씨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이 쓴 초서체로 전해진다.

초서로 쓴 편액 글씨가 경쾌하다. 초서는 붓이 들어가고 나오는 끝이 비교적 많이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유려함과 속도감이 그곳에서 나타난다. 편액의 글씨처럼 많은 절제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드러남은 매우 점잖은 편이다. 특히 齋에서 연결하는 흐름을 가능한 끊고 각각의 필획을 독립적으로 썼다. 초서를 해서처럼 쓰다는 말이 이와 같다. 결과 편액의 글씨는 초서이면서도 해서 같은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자로서 초서 자법(字法)의 깊은 이해는 서법의 깊이를 더해준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전주류씨 박실웃댁 수정재고택(全州柳氏 朴谷上宅 壽靜齋古宅) 소개


류정문의 본관은 전주, 자는 이중(耳中), 초명(初名)은 제문(齊文), 초자(初字)는 회칙(晦則), 호는 수정재(壽靜齋) 또는 낙표(樂飄)이다. 류정문은 1782년(정조6) 3월 7일 안동의 임하현 박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 1744∼1823)이고, 어머니는 의성김씨로 난곡(蘭谷) 김강한(金江漢)의 딸이다. 조부는 노애(蘆厓) 류도원(柳道源, 1721∼1791)이고, 증조는 공조참의를 역임한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1680∼1746)이다. 어려서부터 질박하고 노둔하여 재주와 생각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글자 묻는 것을 좋아하였고, 서가에 어지럽게 꽂힌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모습은 마치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자더라도 아침에 일어나 다시 문안을 드리는 것을 본 장자가 그 이유를 묻자 “제가 곤히 잠들어 새벽에 안부를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10세에 조부 류도원의 상을 당해서는 어른처럼 슬퍼하였으며, 11~12세에 어려운 고문을 만나도 마치 물 흐르듯이 읽으며 문장을 짓는 솜씨가 마치 떠가는 구름 같았다. 숙조인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 1724~1796)에게 배웠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사사하였다. 15세가 되던 1796년(정조20)에는 아버지를 따라 고성에 이르러 인근에 있는 금강산을 둘러보기도 하였다. 그해 가을 동암 류장원의 부고를 접하고는 크게 슬퍼하며 의지할 바를 잃어버린 것을 통탄하였다. 1798년(정조22)에는 안변 부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생활하면서 항상 의관을 정제하고 밤낮으로 스스로를 살필 뿐만 아니라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주변에서 사사로이 근접하는 자들이 없었다. 1805년(순조5) 성시에 참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823년(순조23)에 부친이 병을 얻어 정성을 다해 보살폈으나 그해 8월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1836년(순조36)에는 맏아들 치효(致孝)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38년(헌종4) 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병이 더욱 심하더니 12월 26일 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성김씨 김희천(金熙天)의 딸 사이에서 5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치효, 치교(致敎), 치후(致厚), 치호(致好), 치유(致游)이고, 딸은 김진우(金鎭右)에게 출가하였다. 저서로는 『근사집해近思集解』와 문집인 『수정재집壽靜齋集』 12권 6책이 있다. 이 가운데 「구구채찬九九衫贊」은 수사(修士) 신유백(申儒伯)의 집안이 너무나 가난하여 그 처가 색깔이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옷감으로 적삼을 한 벌 지었으나 82조각으로 기워 지은 것이 마치 승려의 가사와 같아서 몹시 근심을 하자 『주역』을 인용하면서 82조각에서 한 조각을 제외한 나머지가 81조각이므로 적삼의 이름을 ‘구구채(九九衫)’라고 지었다는 내용으로 선비의 청빈한 삶과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전주류씨(全州柳氏) 세거지였던 무실과 박실마을은 안동시 임동면에 위치해 있으며, 임동면은 원래 임하현에 속한 땅으로 1895년 임동면으로 명칭을 바꾸어 안동군에 편입되었다. 지명은 임하(臨河)의 동쪽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1914년 3개의 동리가 분리되어 임하면이 되었다. 이후 1974년 일부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으며 1995년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아기산의 지맥을 등에 지고 임동 동남쪽에 위치하는 박실마을은 영남을 대표하는 반촌의 하나지만, 1994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400여 년 동안 대를 이어 삶의 터전을 일구었던 박실마을은 수몰되었다. 그리하여 배산임수의 구조가 박실과 비슷한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이주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