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재(立齋)
입재(立齋)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성잠마을에 있는 누정인 뇌풍정(雷風亭)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뇌풍정은 법전 입향조인 도은(陶隱) 강각(姜恪)의 손자인 설죽당(雪竹堂) 강재숙(姜再淑, 1677~1758)과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 1689~1756) 형제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6대손인 요육재(了育齋) 강욱(姜昱, 1866~1912)이 1907년에 사제인 강훈(姜鑂, 1874~1941)과 종형인 강일(姜鎰, 1861~1925) 등과 협력하여 두 분이 살던 성잠 터에 신축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이며 앞면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입재’는 강재항의 호로, ‘입(立)’은 확고하게 선다는 뜻이며 『논어』, 「위정爲政」의 “내가 나이 서른이 되어 뜻이 확립되었다. [吾三十而立]”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뇌풍정 편액뿐만 아니라 이곳에 걸려 있는 설죽당과 입재의 편액 글씨 또한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1869~1953)이 행서체로 썼다.
진성이씨 망천파문중(眞城李氏 輞川派門中) 소개
강재항은 백부인 성재(省齋) 강찬(姜酇)에게 학업을 익히다가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였다. 약관 무렵에 과거를 그만두고 독서에만 매진하다가 독학을 하면서 학문이 자칫 고루해질까봐 멀리 노성에 있는 윤증에게 편지를 보내어 의심되는 부분을 질의하였다. 일찍이 아들 택일(宅一)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 정통 학문의 종주는 마땅히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퇴계 이황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퇴계 이후로는 명재께서 그 전함을 얻었는데 규모가 온자하고 실천이 독실하니 진정 훌륭한 현자였다. 내 어려서부터 도의에 감복하여 의귀처로 삼았다. 그런데 네가 만약 편협적인 논리와 색목으로 명재를 존숭한다면 이것은 명재를 진정으로 존숭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남기신 문집을 오래도록 일삼는다면 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무자기(毋自欺) 세 글자를 학문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고 “독서하는 순서는 먼저 『소학小學』 → 『격몽요결擊蒙要訣』 → 『주문지결朱門旨訣』을 배우고 나서 『심경心經』 → 『근사록近思錄』 → 『사서四書』를 읽어야 하며, 본질을 숭상하고 부화함을 없애고 행동을 먼저 하고 문예를 나중에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강재항은 진주강씨 법전 문중에서 처음으로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하였고, 이외에도 강윤(姜潤), 강숙(姜潚), 강필효(姜必孝), 강한규(姜漢奎), 강제(姜濟), 강위(姜鍏), 강용(姜鎔), 강신혁(姜信赫) 등 모두 9명이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강운(姜橒)과 강신혁(姜信赫)은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진주강씨 법전 문중의 세거지인 봉화군 법전면은 문수산과 태백산을 끼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안동부 춘양현에 편입되었다가 순흥부에 속하기도 하였다. 진주강씨가 법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한산군수를 역임한 강덕서(姜德瑞, 1540~1614)의 후손인 강윤조(姜胤祖, 1568~1643)와 그의 두 아들 잠은(潛隱) 강흡(姜恰)과 도은(陶隱) 강각(姜恪)이 병자호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법전리로 입향하면서부터이다. 강흡과 강각은 부모님을 모시고 1636년(인조 14) 12월 파주 교하에서 출발하여 1637년(인조 15) 1월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의 조카사위인 권산기(權山起)의 시골 농장이 있는 법전리 성재미[성잠星岑]에 우거(寓居)하였다. 법전 진주강씨는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나뉘어 마을의 토대를 형성하였는데, 양지마을에는 주로 소론으로 활동했던 강각의 후손들이 거주하였고, 음지마을에는 노론의 당색을 띠었던 강흡의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명실상부한 진주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양지마을에는 도은종택과 해은구택 등이 있으며, 음지마을에는 기헌고택과 경체정 등이 있다.법전은 괴리 또는 유천이라고 하는데, 법전이라는 지명은 법흥사라는 사찰 앞에 있던 큰 밭을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법전천의 옛 이름인 유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유(柳)자의 훈인 ‘버들’이 ‘법(法)’으로 변해 법계(法溪), 법전천(法田川)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다. 강흡과 강각 형제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의 대명의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파주로 돌아가지 않고 법전에 정착하였다. 이들 형제는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포옹(抱翁) 정양(鄭瀁),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손우당(遜憂堂) 홍석(洪錫) 등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칭송되어 숭정처사(崇禎處士)로도 불렸다. 또한 강각은 태백오현에 더하여 태백육은(太白六隱)으로 일컬어졌고, 중국 동진 때의 시인 도잠 도연명의 ‘도(陶)’를 따서 ‘도은(陶隱)’이라 자호하였다. 남송을 인정하지 않아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채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은거했다는 도연명의 이야기는 버드나무를 신하의 충절에 빗대는 전통을 낳았다. 따라서 입향조인 강흡과 강각 형제가 견지했던 숭명배청의 의리가 도연명의 고사와 상통하여 법전천의 어원인 유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법전마을은 태백산을 향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 비룡승천형의 풍수지리학적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 법전면 풍정리와 봉성면 창평리 사이에 있는 갈방산과 가마봉이라는 두 개의 문필봉을 끼고 있어 문과 급제자 25명(음지마을 13명, 양지마을 12명), 무과 급제자 2명, 소과 합격자 31명과 고시 합격자 13명, 그리고 박사와 학자들을 대거 배출하여 영남의 명문가로서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참고문헌- 윤광소尹光紹, 「입재강공묘지명立齋姜公墓誌銘」, 『소곡유고素谷遺稿』 卷8.
- 진주강씨 법전문중 응교공 종회, 『진주강씨 법전문중지』, 2015.
- 김정미, 『진주강씨 법전문중 도은종택 및 석당공』,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국학자료목록집 41,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