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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당(怡老堂)

진성이씨 망천파문중(眞城李氏 輞川派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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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이노당(怡老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61.0x133.0x6.9
  • 건물명 이노당(怡老堂)
  • 공간명 진성이씨 망천파문중(眞城李氏 輞川派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풍산읍 마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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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당(怡老堂)

이노당(怡老堂)


이로당(怡老堂)은 호봉(壺峯) 이돈(李燉, 1568~1624)이 마을 자제들의 교육과 학문 연마를 위해 1612년(광해군 4)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마애리에 산수정(山水亭)과 함께 건립한 정사의 편액이다. ‘이로’는 노인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의미로, 글씨는 20세기 초 이강호(李康鎬, 1863~1946)가 쓴 해서체이다.

엄정한 법이 있다. 하나의 필획에는 시작(起筆)과 마침(收筆)의 법이 있고, 필획의 연결에는 결자(結字)의 법이 있다. 화면의 분할과 字간의 배분에도 포치(布置)의 법이 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큰 법은 ‘문자의 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문자가 분명해야 한다는 생각, 서법이전에 문자가 먼저라는 생각, 누가 이 사실을 부정하겠는가? 우직하도록 그 법에 충실하다. ‘진정한 무엇(趣)은 法 외에 있다’는 고인의 주옥같은 말도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필획이 튼실하고 굳세지만 두께는 일정하다. 필획간 간격도 엄정할 만큼 균일하다. 세 글자는 모두 각각 정방형을 취하고 있다. 모든 면에서 반복적이다. 반복은 지루하다. 글귀 이로(怡老)가 ‘노년을 편안하게’ 라는 뜻이라면 法보다 趣가 더 어울릴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진성이씨 망천파문중(眞城李氏 輞川派門中) 소개


진성이씨(眞城李氏) 망천파 문중은 진성이씨(眞城李氏)의 시조 이석(李碩)의 후손이다. 이석은 대대로 경상도 진보현(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에 살았던 향리로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죽은 뒤 밀직부사로 임명되었으며, 이자수(李子脩)와 이자방(李子芳) 두 아들을 두었다. 이석의 맏아들 이자수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통헌대부 판전의시사에 이르렀고 1363년(공민왕 12) 개경을 침략한 홍건적을 격퇴한 공로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이후 왜구의 침략을 피해 진보에서 안동 마애로 옮겼다가 만년에 다시 지금의 예안 두루(주촌 周村)로 옮기면서 두루마을 입향조가 되었다.

이자수의 손자 이정(李禎)은 뛰어난 무예로 세종 때 북방의 오랑캐를 격퇴하여 변경 지방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건주위 추장 이만주(李萬住)가 변경을 위협하자, 이자수는 영변판관에 발탁되어 부사 조비형(曺備衡)을 도와 약산성(藥山城)을 축조하여 영변에 거진(巨鎭)을 설치하는 데 공적을 남겼고, 또 최윤덕(崔潤德)을 따라 모련위를 정벌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선산부사로 재직할 때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명망을 얻었다. 나아가 여섯 명의 딸을 남백경(南伯庚)·유봉수(柳鳳壽)·정보문(鄭普文)·이주(李疇)·박근손(朴謹孫)·권종(權悰)에게 출가시켜 폭넓은 혼맥을 형성함으로써 가문이 향촌사회에서 재지적 기반을 튼튼하게 하는데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정은 이우양(李遇陽)·이흥양(李興陽)·이계양(李繼陽)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이우양은 무과에 급제하여 인동현감을 역임하였으며 그대로 예안 두루에 살면서 진성이씨 주촌파를 형성하였고, 그의 후손들 역시 두루를 무대로 가문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둘째 이흥양은 증조부 이자수가 진보에서 처음 이거하였던 안동 마애로 옮겨 진성이씨 망천파를 형성하였다. 막내 이계양은 예안의 온계리에 정착하여 진성이씨 온혜파를 형성하여 재지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고, 그의 손자대에 와서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와 퇴계 이황이 출현함으로써 진성이씨 가문은 조선 최고의 명문으로 발돋움하였다.

망천파가 세거하는 ‘마애’는 원래 중국 섬서성 서안시 남전현에 있는 망천의 수려한 산수와 같이 아름다운 산수를 지녀 ‘망천’이라 불렀으나, 낙동강 가 절벽에 바위를 쪼아 만든 마애불이 있어 마애라 바꾸어 불렀다. 또 풍산현에 속했다가 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안동군 풍산내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마애리라 하고 풍산읍에 편입되었다. 이흥양 이후 이호(李壕), 이희청(李希淸), 이원회(李元晦)를 거쳐 이돈에 이르러 재지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돈의 자는 광중(光仲), 호는 호봉(壺峯),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부친은 이원회(李元晦), 모친은 여산송씨(礪山宋氏) 송한룡(宋翰龍)의 딸이다. 1568년(선조 1) 태어났으며 어려서 총명하여 다른 아이의 독서를 듣고 그대로 기억하여 외우면 한 자도 틀린 곳이 없었다. 글을 배울 때는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단정히 앉아 종일 독서 자세가 흐트러진 적이 없었고 밤에도 이와 같았다. 이때부터 문사가 날로 성장하여 또래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점점 성장하면서 율원(栗園) 이홍(李珙)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01년(선조 34)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예조정랑·사간원헌납 등을 역임하였는데, 사간원헌납으로 재직할 때 내암(耐庵) 정인홍(鄭仁弘)의 옳고 그름을 따지다가 영해부사로 좌천되었다. 1612년(광해군 4)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풍산읍 마애리에 산수정,이로당,통승려(統勝廬)를 짓고 마을의 수재들과 함께 부지런히 학문 연마에 매진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성균관직강이 되었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영천군수가 되었다가 1624년(인조 2) 병으로 임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12호로 지정된 이로당은 풍산읍의 동남쪽에 있는 마애의 동북쪽 언덕 위에 낙동강을 바라보며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일자형 집으로 가운데에 1칸 대청을 놓고 그 좌우에 각 1칸씩의 온돌방을 두었다. 좌측 온돌방 뒷벽에는 벽장을 설치했으며, 좌측 온돌방을 제외한 나머지 정면 3칸 전면에 툇마루가 있다. 대청의 앞쪽은 트여 있고 뒤쪽은 판 머름 위에 두 짝 울거미 널문을 달았다. 널문의 위틀에는 철원산이 박혀 있는데, 이 창호 건물은 비교적 오래된 건물에서 주로 볼 수 있다. 건물 구조 양식은 자연석 바른층 쌓기 한 기단 위에 화강암과 막돌을 혼용하여 놓고 가운데 기둥 하나만 원주를 세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운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참고문헌
  • 성만징成晩徵, 「행장行狀」, 『호봉집壺峯集』.
  • 『안동의 지명유래』, 안동민속박물관, 2002.
  • 『안동의 현판(上)』, 안동민속박물관, 2004.
  • 정우락, 「영남의 큰집, 안동 퇴계 이황 종가」, 『경북의 종가문화』 5,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1.
  • 정진영, 「안동 이로당」, 디지털안동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