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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방재(直方齋)

재령이씨 존재파종회장(載寧李氏 存齋派宗會長)

34.0x95.0x4.6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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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직방재(直方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4.0x95.0x4.6
  • 건물명 직방재(直方齋)
  • 공간명 재령이씨 존재파종회장(載寧李氏 存齋派宗會長)
  • 서예가
  • 위치정보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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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방재(直方齋)

직방재(直方齋)


직방재(直方齋)는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1619~1672)이 1661년경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에 건립한 당호의 편액이다. ‘직방’은 자신의 행실을 바르게 한다는 의미로, 『주역』, 「곤괘坤卦」의 “군자는 경(敬)으로써 내면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써 외면을 반듯하게 한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라고 한데서 취한 말이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장식 없이 자연스럽게 마모된 편액에 오래된 글씨를 바라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 좋다. 글씨의 자형도 오래된 느낌이다. 필획은 곧고 반듯하며 굳세다. 곡(曲)이 아니라 직(直)이라 함은 내면의 곧은 자세이고, 원(圓)이 아니라 방(方)이고자 함은 모서리처럼 분명하게 하고자 함이다. 주인의 마음을 읽으면 그 사람을 대하는 듯 숙연해진다. 글씨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상부 점이 특별히 과장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근육이 불끈 불끈 솟은 듯 볼륨감이 있다. 그러나 위압적이기 보다 오히려 소박하고 천진한 모습으로 보인다. 오래된 편액 나무와 어울려 더 그렇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재령이씨 존재파종회장(載寧李氏 存齋派宗會長) 소개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는 영해에서 서쪽으로 약 12㎞ 정도 되며, 창수면소재지인 신기리에서 약 8㎞ 정도 되는 거리에 있으며 69번 지방도로가 마을 복판을 통과한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영해부 오어면에 속했다가 1895년부터 영해군 오서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저곡(닥실)·명서암(冥棲庵)·정촌(鼎村)·최촌(崔村)·뱀골[巳谷]·봉정(鳳亭) 등 자연마을을 전부터 부르던 오촌의 이름을 따서 오촌리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시켰다. 오촌은 오동나무가 많았으며 저곡(楮谷)은 닥나무가 많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정촌은 솥발처럼 세 개의 바위가 있어 붙여졌으며, 명서암은 이휘일이 강학한 정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뱀골은 뱀같이 긴 골짜기가 입구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최촌은 최씨가 사는 마을, 봉정은 오촌 동쪽 재너머 있는 마을로 봉(鳳)이 대나무 열매를 먹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이 마을은 등운산을 등지고 있으며 옛날 풍수지리가의 예언이라며 전해지는 말로는 고관(高官) 석유(碩儒)가 배출된다고 했다는 마을이다. 동쪽은 등운산지맥이 둘러 있고, 서쪽은 칠보산의 여러 지맥이 병풍처럼 둘렀으며, 남쪽은 운서산이 솟아 있다. 내는 인계, 탄계, 운계가 합류하여 오서천이 되어 마을을 안고 돌면서 옥천에서 울령천과 합류하면서 뇌택을 만들고 송천으로 합류한다. 뇌택은 이휘일이 즐겨 찾던 곳으로 북쪽 언덕에 깎아 세운 듯한 10여 길의 바위가 있고 그 위에 평탄하고 둥글어 약 30여 명이 앉을 만하여 몇 칸의 집을 짓고 뇌택정이라 하였으나 세월이 지나 그 옆으로 도로가 나고 지금은 표석만 남아 있다. 뇌택에서 남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옥천도 이휘일이 소요하던 곳으로, 수석의 기이한 모습에 정취를 붙인 곳이다.

재령이씨(載寧李氏)는 경주이씨(慶州李氏) 이알평(李謁平)에서 시작되었는데,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이우칭(李禹偁)이 재령군에 봉해지면서 그 후손들은 재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연산군 연간에 이애(李璦)가 영해부사로 부임하는 숙부 이중현(李仲賢)을 따라 영해로 내려 왔다가 이 고을의 진성백씨(眞城白氏) 백원정(白元貞)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후 자손들이 영해에 터전을 잡게 되었다. 이애가 바로 영해의 입향조이고, 이휘일의 고조부이다.

이휘일의 자는 익문(翼文), 호는 존재이다. 부친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고 모친은 안동장씨(安東張氏)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딸이다. 이휘일은 안동 금계리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1631년 외조부 장흥효에게 수학했다. 그 뒤 호양(湖陽) 권익창(權益昌), 매원(梅園) 김광계(金興繼),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등을 종유했다. 이휘일은 계부 이시성(李時成)과 창원황씨(昌原黃氏) 황대인(黃大仁) 딸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 시기가 대략 생부 이시명이 세상에 뜻을 끊고 가솔을 거느리고 영해에서 영양 석보면 원리로 들어갔다. 효심이 깊었던 이휘일은 양부의 곁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따라가지 못하고 자신의 거처를 망운당(望雲堂)이라 이름을 지어 마음을 드러냈다. 1653년 영해 부사 최혜길(崔惠吉)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생부가 다시 영양의 수비로 은거하여 찾아가기 어려워지자 1661년 저곡리에 명서암을 짓고 찾아오는 학자들과 강학하며 양쪽 부친을 문안했다. 1668년 모친 황씨가 별세하자 저곡에서 상을 치르며 강학에 열중했다. 1670년 모친상을 마친 뒤 양쪽 부모를 함께 모시고 봉양하다가 1672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해 인아리에 장사지냈는데, 1689년에 이장했다. 현재 묘소는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요원리에 있다. 이휘일의 초취 부인은 무안박씨(務安朴氏) 박늑(朴玏)의 딸인데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후취 부인 김시종(金時宗)의 딸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어 동생 이현일의 둘째 아들 이의(李檥)를 후사로 삼았다. 저술로 8권 3책의 『존재집存齋集』이 있다.

존재종택은 이휘일과 이현일 형제의 살림집이었으며 마을 뒷산의 경사면을 따라 북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원래 ㅁ자형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사당은 없어지고 정침의 우측 후방 언덕에 초석만 남아 있다. 종택은 정면 8칸, 측면 6칸 반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침은 전면의 중문간을 중심으로 좌우에 사랑채와 행랑채가 일렬로 연접하여 ㅡ자형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들은 각각 양익사(兩翼舍)로 안채와 연결되어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중문간 우측의 사랑채는 전면에 툇마루를 둔 사랑방과 날개로 돌출한 마루방을 두었고 중문간 좌측의 행랑채는 외양간·문간방·고방을 두었는데 고방이 날개가 되었다. 안채는 전면이 개방된 안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고방을 두고 그 앞쪽으로 안방, 부엌을 붙여 좌익사(左翼舍)를 구성하였다. 또 우측에는 윗상방과 아랫상방을 두고 그 앞쪽으로 고방·중방·책방 등을 배치하였는데, 상방 앞에는 안대청과 연결된 툇마루를 두어 사당으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삼량 가구(三樑架構)이며 대청 좌우측방의 천장을 더그매로 하였다.

존재종택은 1994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3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이휘일 저, 성백효 역, 『국역 존재선생문집』, 한국국학진흥원 고전국역실, 2009.
  • 문화재청(http://www.cha.go.kr/)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한국국학진흥원 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index.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