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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와(不知窩)

창녕조씨 운심정문중(昌寧曺氏 雲深亭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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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부지와(不知窩)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46.5x87.5x5.2
  • 건물명 부지와(不知窩)
  • 공간명 창녕조씨 운심정문중(昌寧曺氏 雲深亭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영천 채약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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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와(不知窩)

부지와(不知窩)


부지와(不知窩)는 조선 후기 학자 일암(一庵) 조채신(曺采臣, 1717~1797)의 호이자 당호 편액이다. ‘부지’에는 세속의 권세와 부귀, 그리고 정치의 득실, 여론의 시비 등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산수자연에 은거하여 유유자적하며 ‘세상일을 모르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조채신의 의지가 오롯이 담겨 있다. 조채신은 「부지와기不知窩記」에서 “내가 반드시 ‘부지(不知)’로써 자호한 것은 무슨 뜻인가? ‘지(知)’에는 진실로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고, 또한 알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이는 ‘부지’에 위배되는 것이고, 반드시 알 필요가 없는데 이를 아는 것은 ‘지’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앎’에서 오는 근심은 항상 ‘지’를 위배하는 데에 있다.

권세와 이익, 그리고 부유함은 모두들 원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이를 원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가난과 곤궁은 모두들 피해야 함을 알지만, 나는 피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조정에서 향당에 이르기까지 정치의 득실과 여론의 시비는 사람들이 알려고 하지만, 나는 초연히 알고 싶지 않다. 한가로이 부지와에 누워 나의 ‘부지의 즐거움’을 온전히 하여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을 알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튼실한 필획은 그래서 씩씩하다. 와(窩)에서 공간처리가 긴밀하고, 연결부의 맺고 풀림에도 고법을 잃지 않았다.

안다고 여기지 말라. 무언가를 알아가는 것은 모른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알지 못한다는 모호한 상태, 부지의 상태가 새로운 앎을 일깨워 준다는 장자(莊子)의 가르침에도 부지(不知)는 큰 울림이 있다. 그 부지(不知)를 당호로 삼았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만나겠다는 의지다. 모른다고 여기면 거리낌이 없다. 튼실한 필획은 그래서 씩씩하다. 窩에서 공간처리가 긴밀하고, 연결부의 맺고 풀림에도 고법을 잃지 않았다. ‘나는 모른다. 문득 발 앞을 막아서는 노란 민들레꽃, 또한 가 닿을 수 없는 나의 바깥’이라고 읊은 시구가 있었다. 새로운 세상에 나선 초년병 같은 신선함인가? 知와 不에서 좌 삐침 획이 반복되었다. 이 정도의 미숙함은 오히려 풋풋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창녕조씨 운심정문중(昌寧曺氏 雲深亭門中) 소개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신라 진평왕의 사위로 창성부원군에 봉군된 조계룡(曺繼龍)을 시조로 하고, 고려 태조의 사위로 대락승에 오른 조겸(曺謙)을 1세조로 하였다. 하지만 옛 족보의 대수가 같지 않아 13세 소감 조송무(曺松茂)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영천 입향조는 조송무의 5세손 조신충(曺信忠)이다. 그는 여말선초의 학자로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과 친하게 사귀었다. 고려 우왕 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새 왕조에 참여하지 않고 영천군 창수면에 은거하였다. 이후 여러 대를 내려가서 고조부 인(軔), 증조부 준창(俊昌), 조부 익룡(益龍), 부친 선명(善鳴)을 거쳐 일암(一庵) 조채신(曺采臣)에 이른다.

조채신의 자는 양보(亮甫), 호는 일암(一庵)·부지옹(不知翁),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계(慈溪) 조선적(曺善迪)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17년(숙종 43) 11월 12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글 뜻을 스스로 이해하였고 배운 것을 질문할 때는 핵심을 찔렀으며, 인물의 선악을 논할 때는 분석이 매우 명쾌하였다. 7~8세 때 『자치통감』, 「한기漢紀」의 유방과 항우의 고사를 읽고 “천하를 어찌 힘으로 차지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사서이경(四書二經)을 읽을 때는 의리를 깊이 탐색하고 은미한 이치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리고 정밀하게 공부를 하여 비록 기이하고 어려운 문자를 보더라도 막힘없이 읽어 내었다. 문사가 날로 진보하면서 제가(諸家)의 서적을 두루 탐독하였다. 향시에 응시하여 장원을 했으나 벼슬길에 뜻이 없어 더 이상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후 채약산에 서실을 짓고 ‘운심정(雲深亭)’이라 명명한 뒤에 자신의 호를 부지옹이라 하였다. 그는 운심정을 지은 뒤에 「운심정」이라는 시를 지어 운심정에서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담박하게 표현하였다.

작은 정자에서 유유자적하니
하필 사람들의 인정 바라겠나
꿈에선 무회씨·갈천씨 만나고
책에서는 복희씨를 대한다오
소나무 바람은 시를 보내오고
개울에 뜬 달 기이함을 더하네
천지사방에 봄이 늘 존재하니
유유자적하며 영지가를 부르네

小亭閒自適
何必要人知
夢裏親懷葛
書中遇孔羲
松琴時送韻
澗月更添奇
六六春長在
優游詠採芝

그는 두문불출한 채 50여 년간 학문 연마에 매진했는데, 특히 『주역』 한 책만을 깊이 연구하였다. 원근의 학자들이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에 운심정이 비좁자 인근에 서재를 증축하여 바깥 편액을 모렴헌(慕濂軒), 안쪽 편액을 태극와(太極窩)라 불렀다. 날마다 서재에서 시문을 짓고 고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1792년(정조 16) 관찰사의 추천으로 침랑에 제수되었으며, 1794년(정조 18)에는 어사의 추천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1797년(정조 21)에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 조채신曺采臣, 『일암집一庵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