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당(草堂)
초당(草堂)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있는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 1658~1737)의 종택에 있는 별당의 당호이자 이 건물을 세운 조덕린의 아들 통덕랑 조희당(趙喜堂, 1680~1755)의 별호이기도 하다. 조희당은 부친을 위해 1695년에 종택의 정침 남쪽 우편에 구축한 건물로, 주로 아이들이 글공부를 하거나 노인들의 거처로 쓰인 곳이다. 현판 좌측에 “외손 생원 김희수(金羲壽)가 89세에 쓰다.”라고 부기되어 있는 것을 보아 편액 글씨는 1848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초당에는 외예손(外裔孫) 생원 이종태(李鍾泰)가 지은 「초당기草堂記」가 걸려 있다. 이종태는 조덕린에 대해 “『주역周易』을 보면서 천지간에 변화와 초목이 자라는 형상을 살피고, 가만히 앉아 사물을 보면서 뜰 안에 자라는 풀들에 담긴 일반의 의미를 터득하였으며,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셨다. 여러 경전을 널리 보아 좋은 글을 쓴 초당이요, 조정에 서서는 정색으로 당당하게 망령된 이들을 지적해 말한 초당이며, 난세를 당해서는 목숨을 바침에 있어 마치 세찬 바람에도 굳건하게 서있는 풀과 같은 초당이었으니 선생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풀이하며, 조희당이 초당이라고 호를 지은 것은 바로 부친의 이러한 지향을 계승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양조씨 옥천종택(漢陽趙氏 玉川宗宅) 소개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는 서쪽으로는 일월산의 갈래인 흥림산이 뻗어 내려 마을의 입구를 막고 있으며, 감북골 서편에 영양읍과 경계를 만들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마을의 전경이 배 모양이라 하며, 마을의 중앙을 흐르는 장군천을 좌우로 하여 용골·논골·성지골·새미골·감북골·앞산골 등의 골짜기를 서로 마주하여 이루어져 주실 또는 주곡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1630년(인조8) 이전 이곳에는 주씨(朱氏)가 살았으나, 조선 중기 때 환란을 피해 이곳 주실로 와 정착한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집성촌이 되었다. 1629년 호은(壺隱) 조전(趙佺)이 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정착한 뒤 매한이라 하였고, 1700년 무렵에는 매계 혹은 매곡으로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감북동과 법곡동을 합하여 주곡리가 되었다. 이 마을은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 개화한 마을이면서, 또한 일제 강점기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지조 있는 마을이다. 조전이 주실에 입향한 배경을 살펴보면, 조원의 조부인 조종(趙琮)이 기묘사화 때 집안에 위기가 닥치자 외가와 처가의 연고가 있는 영주로 낙향했다. 조종은 조인완(趙仁琬)·조의완(趙義琬)·조예완(趙禮琬)·조지완(趙智琬)·조신완(趙信琬)·조형완(趙亨琬) 등 여섯 아들을 두었다. 이 가운데 조형완은 안동의 풍산으로, 조인완의 둘째 아들 조정은 풍기로, 조형완의 아들인 조원은 다시 영양으로 이주해 살게 되었다. 조원이 영양으로 온 것은 부인 함양오씨(咸陽吳氏) 오필(吳滭)의 딸의 고향이 영양의 원당리이기 때문이다. 조전은 조원의 손자로, 아들 석우(石宇) 조정형(趙廷珩)과 함께 주실에 정착했다. 조덕린은 조전의 증손자이고, 부친은 조군(趙頵), 모친은 풍산류씨(豊山柳氏) 류세장(柳世長)의 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덕린의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이며, 별호는 창주(滄洲)이다. 7세부터 숙부 조병(趙頩)에게 수학했다. 14세 때 도산서원에서 수학했고, 15세 때 외가인 하회로 가서 류운룡(柳雲龍)·류성룡(柳成龍) 형제의 가학을 이은 선비들에게 수학했다. 167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91년 문과에 급제해 세자시강원 설서 등을 역임했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고향 주실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했다. 이후 부친 조전, 고산 이유장, 갈암 이현일 등이 세상을 떠나자 1706년 춘양 법전면 소천리 소라에 별서를 짓고 벼슬살이를 잊었다. 이후 1708년 강원도 도사에 제수되어 부임했으나 몇 달 뒤 낙향하여 학문에 열중했다. 1725년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사임소를 올렸다. 당시 노론과 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조의 소를 올렸는데,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 70여 세의 나이로 3년간의 유배 생활 끝에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 응교에 제수되었으나, 서울에 들어와 임금의 은혜에 감사의 절을 올린 후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에 임명되어, 격문을 돌리고 의용병을 규합하여 대구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자 병사들을 해산했다. 이 공로로 동부승지에 임용되고 경연에 참석했는데,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고 낙향했다. 1736년 서원의 남설(濫設)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의 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 받고 제주로 유배 가던 중 강진에서 죽었다. 이 일로 조덕린의 후손은 정계 진출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조덕린의 신원은 몇 차례 복구되고, 삭탈·취소를 거듭하다가 1899년에 온전히 신원되었다. 조덕린의 초취부인은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의 외손인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수하(權壽夏)의 딸이고, 후취부인은 진주강씨(晉州姜氏) 강필명(姜必明)의 딸이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조희당, 조희상(趙喜常), 조희상(趙喜尙)이고, 사위는 이원봉(李元鳳)이다. 묘소는 안동 풍산면 신양리에 있다. 저술로 18권 9책의 『옥천집』이 있다. 옥천종택은 기와를 얹은 토석담으로 둘러싸인 집이다. 그 안으로 살림채인 정침과 서당을 겸한 별당으로 지어진 초당, 그리고 가묘인 사당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문에 대문채를 별도로 두고 있다.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ㅡ자형 건물로, 가운데 칸에 두 짝 대문을 달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어 행랑사람들이 거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초당과 ㅁ자형의 정침이 좌우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정침의 오른쪽 뒤로 네모난 형태로 흙과 돌로 만들어진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3칸 규모의 사당을 두고 있다. 생활공간인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의 건물이다.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마구간을 개조한 온돌방 1칸과 고방 1칸을 두었으며, 좌측에는 2칸의 사랑방을 배치하였다. 안채는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너방과 안방을 두었는데, 건너방의 전면에는 통래칸과 웃고방, 샛마루방을 연접시켜 좌익사를 이루게 하였으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연접시켜 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초당은 주로 글을 읽는 별당 기능을 하는 건물로 쓰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초가인데, 막돌로 쌓은 제법 높은 기단 위에 위치한다. 평면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둔 단순한 형태로 마루를 통해 좌우 온돌방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온돌방 앞에는 평난간을 설치하였다. 사당은 정침 동쪽에 두었는데, 안채와 사랑채와의 동선을 고려하여 안채 우측의 경사지에 배치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맞배지붕으로 정면에 퇴칸을 두었다. 퇴칸은 제관들이 도열하거나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아 마감하였고, 가구는 3량가의 초익공집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사당의 정면에는 출입을 위한 일각문이 있으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러 공간적으로 구분하였다. 일각문 아래로 여러 단의 돌계단을 담장에 붙여 쌓았다. 옥천종택은 1983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조덕린, 『옥천집』.
- 백순철, 『대의와 지족의 표상, 영양 옥천 조덕린 종가』, 예문서원, 2015.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문화재청(http://www.ch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