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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석정(浣石亭)

성주 벽진이씨 완석정종택(星州 碧珍李氏 浣石亭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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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완석정(浣石亭)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29.5x94.0x1.9
  • 건물명 완석정(浣石亭)
  • 공간명 성주 벽진이씨 완석정종택(星州 碧珍李氏 浣石亭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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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석정(浣石亭)

완석정(浣石亭)


완석정(浣石亭)은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1568~1639)이 1621년(광해군 13) 경상북도 성주군 동쪽 30리 지점인 선남 내곡의 낙동강 가에 세운 정자의 편액이다. 정자 앞에 ‘완석’이라는 큰 바위 하나가 강물에 잠겨 있는 데에서 이름을 취하였다. 또 큰 바위가 강물에 잠겨 있는 모습이 마치 파도가 바위를 씻어내는 듯하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언영은 「완석정차심복흥浣石亭次沈復興」이라는 시에서 노년에 벼슬자리를 탐내는 세태를 비판하며 만년에 완석정에 은거하여 산수를 즐기는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백조 노니는 물가에 달빛 배에 가득하니
만년의 삶을 임천에서 늙어가려 한다네
천지를 경륜함에 있어 힘이 없었지만
강산을 꾸미는 일은 또한 책임지겠도다
발길을 이미 녹야당으로 돌렸건만
꿈속의 혼은 하필이면 능연각을 찾으랴
세상의 벼슬에 급급해하는 사람들아
늙어서 좇는 명예 정말 가련하단다

白鳥波邊月一船
晩將身世老林泉
經綸天地雖無力
雕琢江山亦有權
蹤跡旣曾歸綠野
夢魂何必到凌烟
紅塵紫陌紛紛子
皓首名場最可憐

1914년 이언영의 후손들에 의해 완석정은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로 옮겨졌으며 현재는 낙연서당(洛淵書堂)으로 불린다. 이언영의 증조부 이인손(李麟孫)이 처음으로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로 이거하였다가 이언영 때에 성주군 오도종마을로 옮겨왔으니, 칠곡 석전리 역시 완석정 집안의 또 다른 세거지인 셈이다.

편액의 글씨는 유려하면서도 근골이 굳세다. 그런 가운데 질긴 맛이 있다. ‘浣’과 ‘亭’의 ‘宀’에서 특히 두드러지고 ‘石’에서 ‘口’의 우측 꺾임 등에서 더 잘 보인다. 질긴 맛의 필획은 서가의 장점이다. 결과적으로 편액은 역동적인 에너지가 있는 글씨가 되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성주 벽진이씨 완석정종택(星州 碧珍李氏 浣石亭宗宅) 소개


벽진이씨(碧珍李氏) 완석정종택은 고려 삼중대광 개국원훈 벽진장군 이총언(李忩言, 858~938)의 후손으로,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 홈실에 세거하였다. 훗날 후손들이 번성하여 명현거공(名賢鉅公)이 대대로 배출되었는데, 11세손인 산화(山花) 이견간(李堅幹, 1259~1330)이 유명하다. 그는 덕행이 높고 학문이 넓어 “선진의 예악이요, 성당의 문장이다.”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20년 동안 외교 사신으로서 중국을 오가던 그의 풍채를 중국의 사대부들도 그리워하였다. 특히 원나라에 끌려가는 고려 동녀들의 한 맺힌 심정을 전국시대 촉나라 망제(望帝)의 원혼이 화한 두견새의 울음에 비유하여 형상화한 시는 인구에 회자되었다. 14세손인 이희경(李希慶)은 경상도도원수를 지냈으며, 그의 셋째 아들 이수지(李粹之)가 이언영의 6대조이다. 5대조 이권(李惓)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이맹전(李孟專)과는 4촌간으로 학행이 뛰어나고 기품이 있어 뭇사람에게 존경받는 이름난 유학자였다. 그는 1432년(세종 14) 생원시에 합격한 뒤 개령현감과 영유현감으로 부임하여 치적을 남겼다.

이언영의 증조부 이인손은 1519년(중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과거와 출사를 단념하고 낙동강 공암 위에 정자를 짓고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부친 이등림(李鄧林, 1535~1594)은 1573년(선조 6)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공조좌랑·인동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으며,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 당대 영남의 석학들과 어울리며 학문을 익혔다. 이때 다져진 사회적 기반과 학문적 연계망은 아들 이언영이 17세기 초반 영남사림을 대표하는 관료문인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언영의 자는 군현(君顯), 호는 완정(浣亭) 또는 완석정(浣石亭)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일찍이 한강 정구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5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생원으로서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농토를 팔아 말 40필을 마련한 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의 의진에 참여하여 몇 년간 왜적에 맞서 싸워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3년(선조 36) 식년시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경상도도사·성균관전적 등을 역임하였으며 1614년(광해군 6)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영창대군을 살해한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참수하고 영창대군의 억울한 죽음을 강력하게 논하다가 대북파측 대간의 탄핵을 받아 역적으로 몰렸을 때 홀로 정온을 죄줄 수 없다는 상소를 하루에 3차례나 올리며 극력 변호하였다. 이로 인해 정온은 귀양가고 이언영은 10년의 금고형을 받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두문불출하다가 인조반정 이후 영남의 절의지사를 지칭하는 8학사로 선정되어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반정공신들이 선조의 7남인 인성군을 극형에 처하려 하자 또다시 왕가의 골육상쟁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며 지방수령으로 내려갔다. 부임지마다 전란으로 피폐한 민심을 안정시키고 학문을 장려한 그는 66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완석정을 짓고 후진 양성에 매진하는 한편 산수 자연을 유람하며 유유자적하다가 1639년(인조 17) 세상을 떠나니 향년 72세였다.

완석정은 이언영이 1621년(광해군 13) 성주군 동쪽 30리 지점인 선남 내곡의 낙동강 가에 건립하였으나 1914년 후손들이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로 이건하여 중건한 뒤 낙연서당이라 하였다. 최근 주변을 정비하고 솟을대문을 중건한 뒤 서당 건물을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자고산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능선 말단부 북사면에 남서향으로 앉아 있다. 주위를 노송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둘러싸고, 입구에 최근 세워진 ‘완정이선생유허비’가 있다. 솟을대문인 읍청문을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1.5칸의 건물이 마주 보인다. 좌측부터 양월헌 2칸, 대청으로 쓰이는 완석정 2칸, 서운료 1칸이 연이어 있고 전면에는 반칸 툇마루가 있다.

참고문헌
  • 조경趙絅, 「행장行狀」, 『완정집浣亭集』 권7.
  • 허목許穆, 「완석정기浣石亭記」 『완정집浣亭集』 권8.
  • 『영남학맥嶺南學脈』, 신천족보사, 1984.
  • 김태훈, 「낙연서당」, 디지털칠곡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