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공간별 보기

도은구택(陶隱舊宅)

진주강씨 법전 도은종택(晉州姜氏 法田 陶隱宗宅)

58.5x155.0x6.6 / 해서(楷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도은구택(陶隱舊宅)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8.5x155.0x6.6
  • 건물명 도은구택(陶隱舊宅)
  • 공간명 진주강씨 법전 도은종택(晉州姜氏 法田 陶隱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
  •  
r0026_1.jpg
도은구택(陶隱舊宅)

도은구택(陶隱舊宅)


도은구택(陶隱舊宅)은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에 있는 진주강씨(晉州姜氏) 법전 도은(陶隱)종택의 편액이다. 도은종택은 도은(陶隱) 강각(姜恪, 1620~1657)이 1636년 병자호란 때 경기도 파주에서 낙남(落南)하여 은거하던 집으로, 1798년(정조 22)에 수리하였으며 60여 년 전에 다시 고쳤다. 집을 ‘도은’이라 편액하였는데, 이는 동진의 처사 도잠(陶潛) 도연명의 이름 가운데 형 강흡(姜恰)은 도잠의 이름을 취해 잠은(潛隱)이라 자호한 반면 동생 강각은 도잠의 성(姓)을 취해 당호와 자호로 삼은 것이다. 이는 도연명의 삶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함에서 비롯했다. 편액의 글씨는 강각의 7대손인 유계(柳溪) 강명규(姜命奎, 1801~1867)의 빙부인 동원(東園) 김희수(金羲壽, 1760~1848)가 쓴 해서체이다.

굳세고 단정하다. 필획은 힘차고 간격은 엄정하다. 획 간의 간격이 균일하고 좌우 글자간의 공간이 일정하다. 규범을 잘 지키고 법을 따르고자 빈틈이 없다. 네 글자를 공간에 가득하게 쓰면서도 기세의 흐름이 넉넉하고, 거침없이 시원하게 나아간 필치가 생기를 더해준다. 필봉이 나올 듯 말 듯하게 처리한 시작 부분의 필획은 부드럽고 적당히 드러나게 처리한 수필 부분의 필봉은 전체를 맛깔스럽게 한다. 그러나 같은 방법의 기필과 수필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은 간혹 참신함이 감소될 우려가 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진주강씨 법전 도은종택(晉州姜氏 法田 陶隱宗宅) 소개


강각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오(敬吾), 호는 도은(陶隱)이다. 증조부는 강억(姜億), 조부는 강덕서(姜德瑞)이고, 부친은 금부도사를 지낸 강윤조(姜胤祖)이다. 잠은 강흡이 그의 큰형이다. 강각은 1620년(광해군 12) 경기도 교하에서 태어나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인조 14) 17세의 젊은 나이에 부모를 모시고 맏형 강흡과 함께 안동부 춘양현 법전촌으로 이거하였다가 병자호란 이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터를 잡고 살았다. 그는 대명의리를 실천하고자 청나라가 있는 북쪽으로는 창도 내지 않았으며 심지어 청나라 달력인 시헌력을 책상에 두지 않았다. 문 밖에는 대명홍(大明紅)과 연명국(淵明菊) 몇 포기를 심어 대명의리의 뜻을 지켰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행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우국충정의 정신 또한 남달랐다. 형 강흡과 함께 효제충신의 도의를 몸소 실천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의 형제애를 대련(大連)과 소련(小連) 형제의 행위에 빗대어 칭송하였다. 1816년에 영남사림에서 그의 덕행을 조정에 올려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때 내려진 교지에는 강각의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존중하여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 죽을 때까지 자정(自靖 은거하며 뜻을 세워 몸을 깨끗이 함)하였으며 충절이 뛰어났다. [守義皇朝 沒身自靖 忠節卓異]”고 12글자가 써 있었다.

진주강씨 법전 문중의 세거지인 봉화군 법전면은 문수산과 태백산을 끼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안동부 춘양현에 편입되었다가 순흥부에 속하기도 하였다. 진주강씨가 법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한산군수를 역임한 강덕서(姜德瑞, 1540~1614)의 후손인 강윤조(姜胤祖, 1568~1643)와 그의 두 아들 잠은(潛隱) 강흡(姜恰)과 도은(陶隱) 강각(姜恪)이 병자호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법전리로 입향하면서부터이다. 강흡과 강각은 부모님을 모시고 1636년(인조 14) 12월 파주 교하에서 출발하여 1637년(인조 15) 1월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의 조카사위인 권산기(權山起)의 시골 농장이 있는 법전리 성재미[성잠星岑]에 우거(寓居)하였다. 법전 진주강씨는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나뉘어 마을의 토대를 형성하였는데, 양지마을에는 주로 소론으로 활동했던 강각의 후손들이 거주하였고, 음지마을에는 노론의 당색을 띠었던 강흡의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명실상부한 진주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양지마을에는 도은종택과 해은구택 등이 있으며, 음지마을에는 기헌고택과 경체정 등이 있다.

법전은 괴리 또는 유천이라고 하는데, 법전이라는 지명은 법흥사라는 사찰 앞에 있던 큰 밭을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법전천의 옛 이름인 유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유(柳)자의 훈인 ‘버들’이 ‘법(法)’으로 변해 법계(法溪), 법전천(法田川)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다. 강흡과 강각 형제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의 대명의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파주로 돌아가지 않고 법전에 정착하였다. 이들 형제는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포옹(抱翁) 정양(鄭瀁),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손우당(遜憂堂) 홍석(洪錫) 등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칭송되어 숭정처사(崇禎處士)로도 불렸다. 또한 강각은 태백오현에 더하여 태백육은(太白六隱)으로 일컬어졌고, 중국 동진 때의 시인 도잠 도연명의 ‘도(陶)’를 따서 ‘도은(陶隱)’이라 자호하였다. 남송을 인정하지 않아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채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은거했다는 도연명의 이야기는 버드나무를 신하의 충절에 빗대는 전통을 낳았다. 따라서 입향조인 강흡과 강각 형제가 견지했던 숭명배청의 의리가 도연명의 고사와 상통하여 법전천의 어원인 유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법전마을은 태백산을 향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 비룡승천형의 풍수지리학적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 법전면 풍정리와 봉성면 창평리 사이에 있는 갈방산과 가마봉이라는 두 개의 문필봉을 끼고 있어 문과 급제자 25명(음지마을 13명, 양지마을 12명), 무과 급제자 2명, 소과 합격자 31명과 고시 합격자 13명, 그리고 박사와 학자들을 대거 배출하여 영남의 명문가로서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도은종택은 현재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675년(숙종 1) 강각의 장자 성건재(省愆齋) 강찬(姜酇)이 안채를 지은 이후 사랑채 등을 증축하여 안채, 사랑채, 재청, 사당, 별묘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1798년(정조 22)경에 도은의 6대손인 유계 강명규가 중수하였으며 근래 일부분을 수리하였다. 안채는 중앙 정면 3칸 대청의 좌측에 윗방과 안방, 부엌을 두고, 우측에 고방, 작은 사랑방을 둔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된 ㅁ자형으로, 산돌로 높게 기단을 쌓아 건물을 올렸다. 현재 안채는 성건재 당시의 것으로 종택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대청 우측 작은 사랑방에 계자난간을 두른 누마루는 후대에 설치하였다. 안채 앞에 있는 사랑채는 정면 5칸 반, 측면 1칸으로 되어 있으며 문간과 문간방, 사랑방과 마루, 툇마루로 이루어진 일자형 구조이며 툇마루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종택 좌측에 심어져 있는 산배나무는 수령이 350여 년이나 되었다.

참고문헌
  • 강명규姜命奎, 「유계정사기柳溪精舍記」, 『유계집柳溪集』 권5.
  • 윤광소尹光紹, 「처사강공묘지명處士姜公墓誌銘」, 『소곡선생유고素谷先生遺稿』 권6.
  • 진주강씨 법전문중 응교공 종회, 『진주강씨 법전문중지』, 2015.
  • 김정미, 『진주강씨 법전문중 도은종택 및 석당공』,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국학자료목록집 41,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