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당(五友堂)
오우당(五友堂)은 김근(金近, 1579~1656)이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에 세운 생담정사(笙潭精舍) 당호 편액이다. ‘오우’는 심성수양에 도움이 되는 다섯 벗인 송(松)·죽(竹)·매(梅)·국(菊)·연(蓮)을 말한다. 김근은 오우를 심어 놓고 각각의 대상들을 절구 시를 지어 승화하였다. 먼저 소나무를 읊조려 “세모에 홀로 꼿꼿이 서서, 푸른 수염 흰 갑옷 입고 꿈틀거리네. 주인이 아침저녁 하릴없어, 솔가지 만지다가 잠을 청하네. [獨立亭亭歲暮天 倉髯白甲勢蜿然 主人朝暮無餘事 撫罷虬枝枕石眠]”하였고, 대나무를 읊조려 “현인처럼 굳은 성품에 마음 곧아 봄이 되면 가지 사이에 죽순을 남기네. 해마다 흉노의 젓대 만들어 불어 삼청궁의 봉황을 부르려하네. [性直心空似賢人 枝間留得四時春 年來擬作龍庭篴 吹徹三淸致鳳賓]”하였고, 매화를 읊조려 “서호의 풍월이 한가로운 사람에게 있어, 한 그루 맑은 의표 속세를 멀리 벗어난 듯하네. 벼슬살이 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고, 황혼에 풍기는 매화 향기 참으로 좋구나. [西湖風月屬閒人 一樹淸標逈出塵 殷鼎調羹非我事 黃昏浮動正堪親]”하였고, 국화를 읊조려 “도연명은 천 년 전에 떠나 돌아오지 않고, 솔솔 부는 맑은 바람 아득하여 잡기가 어렵네. 주인은 아득한 흥취 너무 많아, 저녁 반찬거리를 위해 동쪽 울타리에 옮겨 심네. [千載陶公去不還 淸風蕭瑟邈難攀 主人贏得悠然趣 移種東籬供夕餐]”하였고, 연꽃을 읊조려 “바위 깨고 반묘의 연못 새롭게 만드니, 신령스런 뿌리가 태화봉에서 온 듯하네. 아침저녁 난간에 기대 마주하노라니, 문득 맑은 바람이 옷깃에 가득함을 느끼네. [鑿石新開半畝塘 靈根來自太華岡 幽軒朝暮澹相對 斗覺光風盈我裳]”라고 하였다. 편액 글씨는 작자 미상이다.
의성김씨 귀미 오우당공파(義城金氏 龜尾 五友堂公派) 소개
김근의 자는 성지(性之), 호는 오우당(五友堂),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아버지는 군자감주부를 역임한 김안계(金安繼)이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로 귀계(龜溪) 이중립(李中立)의 딸이다.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예조정랑을 지낸 옥봉(玉峯) 권위(權暐)의 딸이다. 운천(雲川) 김용(金涌)의 문인으로,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채 15세가 되기도 전에 경사(經史)를 섭렵하였고 책을 읽을 때는 한 번에 여러 행을 동시에 읽는 능력이 있었다. 한 번 읽은 것은 곧 기억하니 특별히 남에게 배우지 않고도 뭇사람에게 존경받는 이름난 유학자가 될 수 있었다. 평소에는 항상 근엄하고 부지런하였으며 산업을 영위하지 않고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이나 부귀하고 권세 있는 집 근처에는 스스로 피하여 가까이 가지 않았으며 좌우에 책을 쌓아 놓고 그 가운데 앉아서 책 속의 깊은 뜻을 탐구하는 일생을 보냈다. 사귀는 친구들은 모두 안동 일대의 명사들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수암(修巖) 류진(柳袗)과 시로 이름을 떨친 정영방(鄭榮邦)과 특히 막역하게 지냈다. 그러나 가까이 살지는 않았기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경전의 뜻을 강론하고 마음을 토로하였기에 오고 간 편지가 쌓여서 권축(卷軸)을 이룰 정도였다. 글 짓는 자리에 참석하면 항상 김근이 지은 글이 첫 손가락에 꼽혔고 붓을 휘둘러 글 한 편을 짓노라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 쌓듯이 모여들었다. 1623년(광해군 15) 높은 성적으로 소과에 합격하였으나 파방되었고, 부친이 사망한 뒤로는 과거보는 일을 오래도록 중단하였다. 1642년(인조 20) 60대 중반의 나이에 친구들의 강권에 못 이겨 진사시에 응시하여 갑과 제3인의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니 실제로는 사마시에 두 번 합격한 셈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일명(一命)도 받지 못하니 관운과는 처음부터 인연이 없었던 모양이다.학문을 좋아하는 성정은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돈독하여져서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부친은 일찍 여의고 홀로 남은 모친을 지성으로 봉양하면서 집이 가난하여 뜻대로 모시지 못하는 것을 언제나 한스럽게 여겼다. 김근은 향년 78세까지 장수하였지만, 중년 이후로 가정에 불행이 겹쳐서 부인 안동권씨와 55세 때 사별하였고 네 아들 가운데 셋을 연달아 잃는 비극을 겪었다. 이에 벽 위에다가 “살아 있을 때는 내 자식이지만 죽으면 내 자식이 아니다. [生爲我子 死非吾兒]”라는 글귀를 써 붙여 놓고는 스스로 슬픔을 달랬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은 “유학자의 도를 이룩한 사람[儒林老成]”이라 칭찬하였고, 사서(沙西) 전식(全湜)은 약봉(藥峯) 서성(徐渻)에게 “성품이 고요하고 편안하며 스스로를 잘 지켜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수암 류진은 “함부로 교유하지 않으며 언행을 조심하였다.”고 하였다. 이렇듯 김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이나 의도적인 목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위기지학의 참된 선비정신을 몸소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귀암정사에 봉안되었으며 저서로 『오우당집五友堂集』, 『사금록沙金錄』이 남아 있다. 그의 문집 중에 「자해自解」는 자식들이 앞서 죽는 등 중년 이후 겪은 연이은 가정사의 불행을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53세 되던 해에 지은 것이다. “1615년(광해군 7) 맏아들이 19세의 나이로 장가도 가지 못한 채 죽고, 1621년(광해군 13) 봄 동생이 27세의 나이로 후사도 없이 죽고, 1630년(인조 8) 둘째 아들이 32세의 나이로 죽고, 올 봄 4월 셋째 아들이 27세의 나이로 죽는 것을 보면서 사생(死生)의 문제는 모두 운명으로 기인한 것이어서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음”을 언급하면서 연이은 상사(喪事)에 대한 슬픈 마음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귀미리는 안동시 남부에 있는 일직면에 소속된 마을이다. 일직은 원래부터 안동부에 소속된 일직현이었으나 1914년 안동군 일직면이 되었다가 현재는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가 되었다. 귀미라 불린 것은 마을 지형이 거북과 뱀이 모인 듯하기 때문이다. 귀미리는 안동에서 의성을 거치지 않고 고운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 앞에 미천이 흐르고 마을의 중간에 신감산이 있다. 마을에는 생담정사 이외에 귀암정사, 니산정, 손암정, 자운정, 사휴서당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귀암정사는 오우당 김근의 유덕을 추모하고 위패를 봉안하는 건물로 1795년(정조 19)에 완성하였다. 니산정은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를 추모하기 위하여 1917년 일직 구천리에 건립했던 것을 1969년 귀미리로 옮긴 것이다. 손암정은 김원(金遠)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자운정은 귀와(龜窩) 김굉(金㙆)의 정자이다. 김굉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예조참판을 지낸 청렴한 관리이며 학문과 필체가 뛰어났다. 사휴서당은 원래 사휴정사였으나 1980년대 중반 새로 지으면서 사휴서당이라 하였다.생담정사는 미천 지류가 바로 정사 앞으로 굽이치고 좌우에 봉우리가 솟은 계곡에 있다. 그래서 이 정사는 화강석 깬 돌과 시멘트를 이용하여 300㎝ 정도로 2단 축대를 높이 쌓아 평지를 만든 다음 자연석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다. 단지 우측 온돌방 중간 두 기둥만 각주를 썼다. 기단은 50㎝ 높이로 사방을 쌓고 그 위에 10㎝ 정도로 시멘트 마감을 하였다. 2칸 온돌방은 바닥이 마루보다 10㎝ 정도 낮다. 마루는 4칸인데 우물마루이고 상부는 오량가에 판대공을 사용하였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마루에는 6개의 문이 있는데 2개는 쌍골판문이고 2개는 쌍띠살문이고 벽은 판벽이다. 쌀골판문에는 머름중방이 설치되어 있다. 온돌방에는 쌍띠살문, 사분합문, 띠살문이 각각 1개씩 있고 천장은 우물단자이다.
참고문헌- 김근, 『오우당집』.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