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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실(千仞室)

우계이씨종택(羽溪李氏宗宅)

32.0x74.0x6.9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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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천인실(千仞室)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2.0x74.0x6.9
  • 건물명 천인실(千仞室)
  • 공간명 우계이씨종택(羽溪李氏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동화 도촌리 사제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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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실(千仞室)

천인실(千仞室)


천인실(千仞室)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사제마을에 있는 공북헌(拱北軒)의 당실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공북헌은 단종을 폐위시키자 벼슬을 버리고 봉화로 낙향한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 1435~1528)이 은거하던 곳이다. 이수형은 이 건물을 지으면서 북쪽으로 창을 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북쪽 방향에 단종이 유배된 영월의 철령포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영월에 있는 단종을 사모하여 북쪽으로 문을 내고 북극성을 바라보듯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일생을 보냈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지은 「공북헌구택기拱北軒舊宅記」에 따르면 창설(蒼雪) 권두경(權斗經)이 이수형의 단종에 대한 충절을 기려 “천 길 절벽 밑에 서 있는 의기와 절조이다.”라는 의미로 방을 천인실이라 이름 붙였고 마루는 이수형이 두 손을 잡고 평생토록 단종을 경모했다는 뜻에서 공북헌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광정의 시대에는 후대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 침침하고 옹색한 점이 괴로워 헐어버렸다가 이수형의 8대손 대에 이르러 그 자리에 다시 세웠다. 현재 공북헌은 이수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도계서원의 경내 안에 있는데 서원의 강당 뒤쪽에 있다. 편액 글씨의 저자는 미상이며, 해서로 쓰였다.

두툼한 필획이 좋다. 단순한 필획의 글자는 내부공간이 허전하게 구성될 수 있다. 이를 두텁고 강한 필획만으로 해결하고 있다. 다른 형태의 변화에 의지하지 않았다. 특히 가로획이나 세로획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데 치우치지 않고 세로와 가로 둘 다 강한 필획을 사용하였다. 千자를 그렇게 쓰고 난 후 仞과 室 또한 모든 필획을 같은 수준의 강도로 이어갔다. 꾸밈이 없는 단순한 필획에만 집중하였다. 일체의 다른 꾸밈은 용납하지 않을 태세다. ‘천 길 절벽 밑에 서 있는 의기와 절조’라고 알려진 당호주인을 대하는 서사자의 기상이다. 편액을 쓴다는 것은 주인 ‘그 사람’을 쓰는 것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우계이씨종택(羽溪李氏宗宅) 소개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는 동쪽으로는 낙화암천 너머 해발 264m가 조금 넘는 달봉산, 남쪽으로는 문단마을과의 사이에 위치하는 봉우재, 북쪽으로는 화천마을과의 사이에 자리 잡은 노인봉을 두고 있는 마을이다. 낙화암천은 동편에 서서 내성천을 향해 남행하여 마을은 남북 방향으로 터진 넓은 범람원 속에 주로 서쪽 산자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형국이다. 사제마을은 큰마라고도 부르는데, 사제는 주변에 모래가 많다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계이씨(羽溪李氏)의 집성촌이다. 이 사제마을 외에도 도촌리는 도지미(도촌)·건너리편(음평)·밤나무실(율리)·사령댕이(사령당)·서원마(서원촌)·섯밭(서전)·사창말(사창) 등을 포함하여 이루어진다. 도촌이라는 마을 이름은 도촌 이수형으로부터 유래한 것이고, 음평은 마을이 낙화암천 너머 동쪽이 산에 막힌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음지이기 때문이다. 율리는 밤나무가 많은데서 유래하는데 낙화암천 건너 있으며 단양우씨 마을이다. 서원촌은 사제마을 북쪽에 있는데, 도계서원이 여기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서전은 사제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각성바지들이 살아서 갖게 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사창마을은 은평 동쪽 산기슭에 있으며 사창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는 이름이다.

우계이씨는 고려 좌복야를 지낸 이양식(李陽植)이 시조이다. 우계는 현 강원도 강릉의 옛 이름이다. 우계이씨의 영주 입향조는 이양식의 8세손 이억(李薿)이다. 그는 직제학 순흥안씨(順興安氏) 안영부(安永孚)의 사위였는데,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하자 벼슬에서 벗어나 순흥으로 내려와 은둔한 것이다. 이수형은 이억의 4세손으로, 자는 영보(英甫), 호는 도촌,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부친은 이경창(李景昌), 모친은 순흥안씨(順興安氏) 안구(安玖)의 딸이다. 21세 되던 해 평시서령이라는 직위에 있을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생육신의 일원인 관란(觀瀾) 원호(元昊), 어계(漁溪) 조려(趙旅)와 함께 단종을 향한 충절의 징표로 원주 치악산에 있는 바위에 각자의 이름을 새기고는 처향인 순흥 도지리(현 봉화읍 도촌리)로 이주해 은거하였다. 이수형은 세조가 대군의 신분으로 있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였다. 이런 까닭에 왕위를 찬탈 후에도 세조는 인근의 관원을 시켜 음식을 정기적으로 보내 우대하곤 했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은거지인 도지리의 지세를 고려할 때 동남향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마땅함에도 이수형은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 그 이유는 단종의 능인 장릉이 있는 영월 방향을 항상 바라보고자 하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수형은 낙향한 뒤 뒤뜰에 괴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이수형이 죽은 다음해 이 나무도 말라죽었다. 그런데 130여 년 뒤 단종이 복위된 다음해부터 다시 살아나 잎이 돋고 꽃이 피었다고 전한다. 이수형의 부인은 선성김씨(宣城金氏) 김담(金淡)의 딸이다. 5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대근(李大根)·이양근(李養根)·이성근(李盛根)·이준근(李峻根)·이지근(李之根)이고, 사위는 손백돈(孫伯暾)이다. 1858년(철종 9) 승정원 좌승지(承鄭院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고종 때는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추서되었다.

공북헌은 정면 1칸, 측면 2칸 반의 구조이다. 정면 1칸의 앞부분만 트여 있고, 나머지는 모두 막혀 있다. 정면 1칸 영역의 처마 밑에는 ‘우계이씨 공북헌’ 현판이 게시되어 있다. 현판 앞, 위쪽으로는 지붕의 삼각 구조 측면의 풍판이 있다. 풍판은 아랫부분을 일선으로 잘라 처리해 삼각형 구조를 갖추었다. 이것은 뒤편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건물의 앞 쪽에는 마루방을 두었다. 정면 1칸, 측면 1칸 반 규모이다. 양쪽 측면은 창문도 없이 벽으로 처리되어 있다. 뒤쪽은 뒤쪽 방의 문과 벽으로 되어 있다. 뒤쪽 방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이다. 방의 정면 벽은 공간이 각재 횡목에 의해 3분되고 있다. 벽면의 3/4 정도 되는 곳에 위쪽 문틀을 이루는 횡목이 배치된다. 그 위쪽으로 30cm 정도 올려서 또 하나의 횡목이 가로지른다. 그래서 벽면은 3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맨 아래쪽의 넓은 공간 한가운데는 2쪽 방문이 달려 있다. 맨 위의 공간은 벽면 중앙에 기둥을 세워 올려 들보를 받치고, 그 위에 양쪽으로 사선을 이루는 서까래의 면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전에는 이 부위에 천인실이라는 현판이 게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방의 3벽은 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밖에서 보았을 때 방의 양쪽 측면 벽은 기초 부분이 60cm 정도 되고, 그 위쪽의 벽면은 아래 3, 위 2 정도의 비례로 횡목에 의해 양분된다. 그 아래쪽 벽면에 뒤쪽으로 치우쳐서 조금 작은 방문의 모습을 갖고 있는 창이 옆으로 누운 자세로 매달려 있다. 벽면을 가로지르는 횡목에 단단히 고정되어서 위 아래로 여닫게 되어 있다. 방의 뒤쪽 벽면에 붙어있는 창은 크기가 훨씬 작은 직사각형 모습이다. 기초 부분 위의 벽면은 2개의 각목에 의해 횡으로 3분되고, 그 가운데에 창문이 위쪽으로 올라붙어 있다. 이 가운데 벽면은 또 창의 아래 문틀을 이루는 횡목에 의해 차단되어 있기도 하다. 이 창문 역시 위 아래로 여닫는 구조이다. 이 건물은 2008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37호로 지정됐다.

참고문헌
  • 문화재청(http://www.cha.go.kr/)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한국국학진흥원 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index.do)
  • 청량산박물관, 『봉화의 누정기』, 봉화군,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