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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당(慶壽堂)

무안박씨 영해파 경수당종택(務安朴氏 寧海派 慶壽堂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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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경수당(慶壽堂)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78.5x169.5x5.8
  • 건물명 경수당(慶壽堂)
  • 공간명 무안박씨 영해파 경수당종택(務安朴氏 寧海派 慶壽堂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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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당(慶壽堂)

경수당(慶壽堂)


경수당(慶壽堂)은 박세순(朴世淳, 1539~1612)이 1570년(선조 3)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건립한 종택의 당호 편액이다. 밀암(密菴) 이재(李栽, 1657~1730)의 「경수당중수기慶壽堂重修記」에 따르면 『주역』, 「곤괘 문언坤卦文言」에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했는데, 이는 집안에서 쌓은 업적이 착하면 복록과 경사가 자손에게 미친다는 의미이다. 또 『서경』, 「홍범洪範」에는 “오복의 첫째는 장수함이다.[五福 一曰壽]”라고 했는데, 이는 사람이란 반드시 천수를 누려야 여러 가지의 복을 길이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경수’는 『주역』에서 ‘경(慶)’자를 『서경』에서 ‘수(壽)’자를 취한 것으로, 대대로 덕업을 삼고 선행을 베풀어서 복록과 경사 및 수명을 누린다는 의미이다. 박세순의 둘째형 박세현(朴世賢, 1521~1593)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김해부사를 거쳐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이르렀다. 그는 퇴계 이황의 질녀와 혼인했는데, 이 인연으로 퇴계가 무안박씨(務安朴氏) 가문에 ‘경수당’이라는 당호를 친필로 써서 보내 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후일 넷째 아우 박세순의 집에 걸리게 된 것이다. 1668년(현종 9) 화재 때 온 집이 다 탔으나 경수당 편액만 한 아이의 기지로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편액의 글씨는 퇴계 이황의 친필로 전해진다.

주된 건물의 외벽에 있을 만한 대형 편액이다. 글씨 또한 용트림할 듯한 기둥의 기세에 당당히 맞설 만하다. 엄정한 해서의 필법은 고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두툼한 필획을 위한 기필의 방법, 필획의 연결부 처리에 에너지의 중첩된 응축, 그리고 마무리 필획의 무거운 처리 등은 고법의 적통임을 자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부분을 모나게 하지 둥글게 처리하여 각박한 단점을 극복하였다. 남북조시기 북비 글씨가 다소 과장된 장식을 두른 장수의 풍모라 한다면 이 편액 글씨는 법식에 맞는 의관을 정제한 공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무안박씨 영해파 경수당종택(務安朴氏 寧海派 慶壽堂宗宅) 소개


경수당 문중은 고려 때 국학전주를 지낸 박진승(朴進昇)의 후손이다. 진승 집안이 영해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박세순의 조부 박지몽(朴之夢) 때부터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진승의 12대손인 선전관 박해(朴解)는 벼슬을 버리고 여주로 퇴거하였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부모를 여읜 박지몽은 1470년경 영덕현령으로 부임하는 백부 박이(朴頤)를 따라 영덕으로 왔다가 인근 영해의 수려한 산수에 반하여 돌아가지 않고 정착하였다. 이후 영해에 거주하던 함길도도사를 지낸 박종문(朴宗文)의 딸과 혼인하여 영해로 이주하면서 무안박씨 영해 입향조가 되었다. 연산군 때 권신 임사홍(任士洪)의 고종인 박지몽은 임사홍의 전횡이 장차 자신에게 화를 불러올 것을 염려하여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지몽이 영해 인량리에 터를 잡은 뒤 자손이 번성하고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조카인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과 농아당(聾啞堂) 박홍장(朴弘長)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자손들은 인량리를 비롯하여 원구, 도곡, 갈천, 인천, 삼계 등지로 퍼져 나갔다. 마침내 조선 후기에는 영양남씨(英陽南氏), 재령이씨(載寧李氏), 안동권씨(安東權氏), 대흥백씨(大興白氏)와 더불어 영해 지방의 5대 성씨의 반열에 들었다.

박세순의 자는 공검(公儉), 호는 경수당(慶壽堂), 본관은 무안(務安)이며 부친은 박영기(朴榮基), 모친은 영해신씨(寧海申氏)이다. 1539년(중종 34) 영해 원구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학문보다 무예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임진왜란 때 후방의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군자감정의 직을 맡았는데, 이때 조카 무의공 박의장은 경주부윤으로 명나라 군대와 힘을 합쳐 경주와 울산 등지에서 왜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박의장이 군량미가 떨어져 곤경에 처하자 박세순은 양곡 800석을 내어 700석은 군량미로 쓰고 나머지 100석은 난민을 구제하는 데 쓰도록 하였다. 1599년(선조 32) 무과에 급제하여 내섬시봉사가 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임진왜란 때 세운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2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절위장군과 오위장의 벼슬을 거쳐 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서 지내다가, 1612년(광해 4)에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7호로 지정된 경수당종택은 박세순이 1570년(선조 3)에 99칸 규모로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1668년(현종 9)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증손인 박문약(朴文約)이 1713년(숙종 39)에 지금의 규모로 복원하였다.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112번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원구마을 안쪽 평지에 북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은 ㅁ자형 정침과 경수당 편액이 붙은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입구 정면으로 정침이 있고 그 오른쪽에 대청이 있다. 대청 전면에 일각문이 있고, 대청 뒤쪽에 사당과 서당이 있었으나 철거되어 지금은 후원만 조성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6칸 규모의 건물로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도장과 마구간을 두었으며, 우측으로는 안사랑방과 대청 2칸, 감실방이 맞닿아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편날개집을 이룬다. 대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좌측 칸에 앞뒤로 2칸의 대청방을 두고 우측 칸은 모두 마루방으로 꾸몄다. 종택 후원의 연못가에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124호로 지정된 향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높이가 6m, 둘레가 3m, 밑둥치 둘레가 4.7m, 수관폭이 8.9m로 나뭇가지 일부가 고사했으나 수령에 비하여 나무의 형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이 향나무는 주로 울릉도에서 자라는 수종인데, 당시 약 300년생이 된 나무를 옮겨 심었다고 하므로 현재 나무의 수령은 대략 7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일설에는 경수당의 건립자인 박세순이 심었다지만 고증할 만한 기록은 없다. 경상북도 내륙 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나무로 추정되며 노수(老樹) 보호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향나무의 생태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학술 자료다.

참고문헌
  • 박선장朴善長, 「절위장군첨지중추부사겸오위장박공세순묘갈명병서折衛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朴公世淳墓碣銘竝書」.
  • 우인수, 『문무의 길, 영덕 청신재 박의장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3.
  • 유교넷, 유적인물지도(ugyo.net/tu/psn/man.jsp?sMan_Code=2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