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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집당(咸集堂)

영주 선성김씨 함집당종택(榮州 宣城金氏 涵集堂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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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함집당(咸集堂)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42.2x90.0x8.3
  • 건물명 함집당(咸集堂)
  • 공간명 영주 선성김씨 함집당종택(榮州 宣城金氏 咸集堂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이산면 신암리-두암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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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집당(咸集堂)

함집당(咸集堂)


함집당(咸集堂)은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있는 두암(斗巖)고택의 본채 앞에 있는 사랑채의 당호 편액이다. 두암고택은 1590년 두암(斗巖) 김우익(金友益, 1571~1638)이 지은 집이다. 함집당은 건립자인 함집당(咸集堂) 김종호(金宗灝, 1630~1682)의 호이기도 하다. ‘함집’은 『중용中庸』에 “종묘에서 거행하는 제례의 핵심은 소목(昭穆)의 차례를 정하는 것이다.[宗廟之禮 所以序昭穆也]”라고 하였는데, 주자가 이것을 해석하여 “자손과 형제들이 각각 자신의 소(昭)와 목(穆)에 무리를 이루고 있어도 모두 그 차례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子姓兄弟群昭群穆 咸在而不失其倫焉]”라고 한 것에서 따왔다. 즉 김종호가 선대의 덕업을 이어 자손들이 길이 화목하게 지낼 것을 기약한 것이다. 글씨는 행서로 쓰였다.

‘제현이 다 모였다’는 뜻의 함집(咸集)은 왕희지의 『난정서』에도 군현함집(群賢咸集)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편액의 두 글자도 난정서 서풍으로 보인다. 특히 서성(書聖) 왕희지의 글씨를 절대적으로 추종하던 당시의 서풍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咸集’ 두 글자보다 난정서와 무관한 ‘堂’자의 기상이 더 돋보인다. 이 당자와 같이 당당하고 늠름한 기상이 내안의 나에게 있었다. 때론 왕희지의 글씨처럼 잘 써야겠다는 지금의 생각이 내안의 나를 속박하여 억누르지만 않는다면 그 내면이 드러날 수 있다. 글씨는 그 사람에 쌓인 뜻이 담기는 것이며 , 그 뜻은 무심한 가운데 배어 나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의도한 대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의도가 없다고 해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영주 선성김씨 함집당종택(榮州 宣城金氏 咸集堂宗宅) 소개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는 신암리는 조선시대에는 영천군 말암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본리와 신천리를 병합하고, 신천과 말암의 이름을 따서 신암리라 하고 영주군 이산면에 편입하였다. 현재 1리, 2리, 3리로 나누어져 있다. 신암 1리에는 삼봉골, 얼음골, 실내가 있으며, 2리에는 우금, 머름, 3리에는 사금, 미륵당, 하고개, 솔고개, 속골, 새터, 새마, 배진기 등의 마을이 있다. 신암 1리에 있는 삼봉골은 우금 북쪽마을로 마을의 좌면·우면·후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3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해서 삼봉골이라 불렸다. 실내는 삼봉골 북쪽 마을로 마을 앞에 큰 들이 있었는데, 대홍수로 제방이 유실되어 들이 하천 물길로 바뀌어 새로운 길이 형성되었다 해서 실내 혹은 신래라는 이름을 얻었다. 얼음골은 실내의 앞뒤 산이 수목으로 울창하고 내성천의 강바람이 불어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이웃 마을보다 얼음이 일찍 언다고 하여 얼음골이라 불렸다. 신암 2리에 있는 우금마을은 선성김씨(宣城金氏)가 개척한 마을로, 마을의 앞산 줄기와 뒷산 모양이 천사가 거문고를 타는 형상과 같다 해서 우금이라고 하였다. 머름은 연안김씨 마을로 만취당 김개국이 지은 만취당 정자가 있다. 신암 3리에 있는 미륵당은 마을 입구에 미륵불이 있어 붙여진 동네로, 불당동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새터는 1783년경 신야(新野) 이인행(李仁行)이 개척했는데, 이인행의 호인 신야에서 신자를 따서 새터라 불렀다. 현재 신암리는 예안김씨, 함창김씨, 연안김씨의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선성김씨가 신암리 우금마을에 입성한 것은 1620년경 한성부 좌윤을 지낸 두암 김우익부터이다. 선성김씨는 고려 충렬왕 연간에 선성현의 호장을 지냈던 김상(金尙)이 시조이다. 대대로 선성현의 호장을 지냈으며 5세 김성세(金成世) 때부터 중앙에 진출한 뒤 10세 김증(金潧)과 김담(金淡)에 이르러 크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우익 일가는 선성김씨의 영남파로, 영주 집경루에서 분가하여 처음으로 우금촌에 자리를 잡았다.

두암종택을 일군 김우익은 자가 택지(擇之), 호는 두암이다. 부친은 김윤의(金允誼), 모친은 한양조씨(漢陽趙氏) 조양(趙諒)의 딸이다. 어려서 송소(松巢) 권우(權宇)에게 수학하였고, 1612년 문과에 급제하여 거산도 찰방, 황해도사, 형조좌랑, 안동제독, 진주제독 등에 제수되었다. 1638년 한성부서윤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가을 해미현감에 제수되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고을 사람들이 의병대장으로 추대해 활약하였다. 김우익은 특히 선조들을 공경하는 일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으로부터 비문을 받아 5대조 김담(金淡)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세운 일을 비롯하여 조상들의 묘표(墓表) 건립을 평생의 과업이자 후손의 도리로 생각하며 차례로 성사시켜 나갔다. 부인은 순천김씨(順天金氏) 김윤흠(金允欽)의 딸이다. 3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찬(金鑽), 김옥(金鈺), 김첨(金詹)이고, 사위는 권상신(權尙信), 전유흠(全有欽), 전익희(全益禧), 민성(閔鋮), 김요필(金堯弼)이다. 묘소는 감천의 고방산 아래 사향언덕에 있다.

사랑채인 함집당은 김우익의 손자 함집당 김종호가 세운 건물이다. 김종호의 자는 심원(深源), 호가 함집당(咸集堂)이다. 부친은 김찬, 모친은 풍산김씨(豐山金氏)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외조부인 김응조에게 수학하였고, 1660년에 생원에 합격하였다.

두암고택은 대문으로 들어서면 좌측에 독립된 사랑채인 함집당이 자리하고, 우측에 정침과 사랑이 ㅁ자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대문채가 함집당이나 정침과 축을 달리 하고 좌향조차 달리하고 있다. 함집당은 4칸 마루와 좌측의 2칸 온돌방으로 구성되었고, 마루 좌측면에는 판벽과 띄살무늬 분합문이 달렸으며, 방에는 머름을 드린 위로 역시 띄살분합문을 달았다. 마루와 방 밖으로 툇마루를 두어 외부와의 접근이 용이하다. 정침과 사랑채는 같은 ㅁ자형 평면 내에 자리한다. 대문 쪽에서 바라다 보이는 사랑채의 2칸 측면은 정침보다 1칸 더 돌출된, 즉 전퇴를 둔 3칸으로 좌측 1칸, 마루 온돌방 2칸을 두었다. 기둥은 방형이고 납도리 홑처마집으로 사랑채 우단에 연결하여 정침으로 들어가는 중문칸을 두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반듯한 마당이 보인다. 서변에 집이 들어찼고 정면에 정침대청이 자리하였다. 대청은 3칸으로 활짝 열렸고, 높직한 방주가 위세 좋게 서 있다. 대청의 면적은 6칸인 셈으로 널찍하게 활달하며 연등천장인 관계로 3량가의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굵고 강경한 대량을 천연목재의 만곡성을 그대로 채택하고 그 중앙에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서까래는 장연이 소요되었다. 정침은 매우 고격을 지니고 있으며 정침후원은 조원(造園)한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황폐되어 있다. 가묘(家廟)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맞배지붕 홑처마의 구성이며 전퇴를 개방하고 평주를 원주로 썼으나 다른 기둥들은 방주이다.

참고문헌
  • 박시원朴時源, 『일포집逸圃集』.
  • 이종정, 『영주의 문화유산』, 2005.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