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공간별 보기

치암(耻庵)

영주 선성김씨 함집당종택(榮州 宣城金氏 咸集堂宗宅)

33.5x62.0x5.2 / 행서(行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치암(耻庵)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33.5x62.0x5.2
  • 건물명 치암(耻庵)
  • 공간명 영주 선성김씨 함집당종택(榮州 宣城金氏 咸集堂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이산면 신암리-두암고택
  •  
r0124_1.jpg
치암(耻庵)

치암(耻庵)


치암(耻庵)은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있는 두암(斗巖)고택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두암고택은 두암 김우익(金友益, 1571~1638)의 집이며, 치암은 고종 때 영남만인소의 소수(疏首) 김석규(金碩奎, 1826~1883)의 호이다. ‘치(耻)’는 원래 『맹자』에서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어서는 안 되니, 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면 치욕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人不可以無恥 無恥之恥 無恥矣]”라고 한 대목에서 따왔는데, 소수로 활약한 김석규가 오랑캐의 풍속이 물질적 풍요를 내세워 유입되면서 시속이 혼란하고 도의가 쇠미해진 시대를 직면하고는 선비로서 부끄럽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편액의 글씨는 행서로 쓰였다.

‘치(恥)’, 부끄러움을 아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는 듯 반갑다. 이런 문자로 당호를 짓고 편액을 만들어 걸어둔다는 뜻은 주변에게 속내를 드러내고 공표하는 것이다. 부끄러운 점 없이 살수는 없겠지만 그렇더라도 오며가며 이 편액을 마주대할 때만이라도 부끄러움을 잊지 않겠다는 주인의 자세에 숙연해진다. 이와 같이 편액은 문구의 의미와 주인의 의도, 그리고 그것을 화면에 실현한 시각적 표현에 이르기까지 상호 관계가 긴밀하다. 때로는 편액을 보며 시각적인 감상의 호불호가 무색할 때가 있다. 서예작품이란 시각적 형태만으로 한정해서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이 편액 글씨 또한 이런 맥락에서 더 훌륭하다. 주인의 마음과 문구의 의미를 적절하게 담아 맑고 담백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영주 선성김씨 함집당종택(榮州 宣城金氏 咸集堂宗宅) 소개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는 신암리는 조선시대에는 영천군 말암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본리와 신천리를 병합하고, 신천과 말암의 이름을 따서 신암리라 하고 영주군 이산면에 편입하였다. 현재 1리, 2리, 3리로 나누어져 있다. 신암 1리에는 삼봉골, 얼음골, 실내가 있으며, 2리에는 우금, 머름, 3리에는 사금, 미륵당, 하고개, 솔고개, 속골, 새터, 새마, 배진기 등의 마을이 있다.

신암 2리에 있는 우금마을은 선성김씨(宣城金氏)가 개척한 마을로, 마을의 앞산 줄기와 뒷산 모양이 천사가 거문고를 타는 형상과 같다 해서 우금이라고 하였다. 선성김씨가 신암리 우금마을에 입성한 것은 1620년경 한성부 좌윤을 지낸 두암(斗巖) 김우익(金友益, 1571∼1639)부터이다. 선성김씨는 고려 충렬왕 연간에 선성현의 호장을 지냈던 김상(金尙)이 시조이다. 대대로 선성현의 호장을 지냈으며 5세 김성세(金成世) 때부터 중앙에 진출한 뒤 10세 김증(金潧)과 김담(金淡)에 이르러 크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우익 일가는 선성김씨의 영남파로, 영주 집경루에서 분가하여 처음으로 우금촌에 자리를 잡았다.

두암종택을 일군 김우익은 자가 택지(擇之), 호는 두암이다. 부친은 김윤의(金允誼), 모친은 한양조씨(漢陽趙氏) 조양(趙諒)의 딸이다. 어려서 송소(松巢) 권우(權宇)에게 수학하였고, 1612년 문과에 급제하여 거산도찰방, 황해도사, 형조좌랑, 안동제독, 진주제독 등에 제수되었다. 1638년 한성부서윤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가을 해미현감에 제수되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고을 사람들이 의병대장으로 추대해 활약하였다.

김석규(金碩奎, 1826~1883)는 자가 덕문(德文), 호가 치암(恥庵)이다. 두암 김우익의 10세손이고, 부친은 김휘경(金輝京, 1806~1873), 모친 반남박씨(潘南朴氏)는 진사 박종교(朴宗喬)의 딸이자 사간(司諫) 박시원(朴時源)의 손녀이다. 정재 류치명에게 수학하였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돌아와서 올린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으로 인해 개화정책이 활발해지자 영주향교에서 척사소와 관련된 통문을 발송하고 안동에서 영남유림 800명이 모여 영남만인소를 행할 때 이만손(李晩孫)과 그의 이름을 가장 앞에 적어 올렸다. 이 때문에 형조에서 취조를 받고 평안남도 덕천으로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김석규는 『춘추호전春秋胡傳』을 빌려서 읽고, 오랑캐와 화해하여 환란을 빚은 사례들을 간추려 책을 집필하여 나라의 문호개방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깨우치려 하였다. 결국 김석규는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묘소는 두암 도산의 간좌 언덕에 있다. 초취부인은 전주최씨(全州崔氏) 최운석(崔雲錫)의 딸이고, 재취부인은 청주한씨(淸州韓氏) 한성교(韓聲敎)의 딸이다. 아들 김정현(金正鉉)은 최씨 부인의 소생으로 김석규의 귀양길을 따르다 병으로 요절하였다. 한씨 부인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의현(金義鉉), 김병현(金秉鉉)이고, 사위는 이중인(李中寅)이다. 저술로 8권 4책의 『치암집恥庵集』 및 『서천록西遷錄』, 『도설잡기圖設雜記』, 『호전찬요胡傳簒要』 등이 있다.

목숨 걸고 상소했던 진동과 같았고
귀양 살다 세상 떠난 계통과 같도다
누구인가, 『춘추』 한 부를 이어 써서
어느 해 유월 찬바람 일으켰던 분이

持斧之陳東歟
歸阪之季通歟
誰將一部春秋嗣書
某年六月冷風者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는 묘지명에서 목숨을 걸고 극간한 모습을 칭송하며 유배지에서도 『춘추호전』을 읽으며 세태를 걱정한 김석규를 기리고 있다.

김석규가 태어나 성장한 두암고택은 대문으로 들어서면 좌측에 독립된 사랑채인 함집당이 자리하고, 우측에 정침과 사랑이 ㅁ자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대문채가 함집당이나 정침과 축을 달리 하고 좌향조차 달리하고 있다. 함집당은 4칸 마루와 좌측의 2칸 온돌방으로 구성되었고, 마루 좌측면에는 판벽과 띄살무늬 분합문이 달렸으며, 방에는 머름을 드린 위로 역시 띄살분합문을 달았다. 마루와 방 밖으로 툇마루를 두어 외부와의 접근이 용이하다. 정침과 사랑채는 같은 ㅁ자형 평면 내에 자리한다. 대문 쪽에서 바라다 보이는 사랑채의 2칸 측면은 정침보다 1칸 더 돌출된, 즉 전퇴를 둔 3칸으로 좌측 1칸, 마루 온돌방 2칸을 두었다. 기둥은 방형이고 납도리 홑처마집으로 사랑채 우단에 연결하여 정침으로 들어가는 중문칸을 두었다. 중문을 들어서면 반듯한 마당이 보인다. 서변에 집이 들어찼고 정면에 정침대청이 자리하였다. 대청은 3칸으로 활짝 열렸고, 높직한 방주가 위세 좋게 서 있다. 대청의 면적은 6칸인 셈으로 널찍하게 활달하며 연등천장인 관계로 3량가의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굵고 강경한 대량을 천연목재의 만곡성을 그대로 채택하고 그 중앙에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서까래는 장연이 소요되었다. 정침은 매우 고격을 지니고 있으며 정침후원은 정원을 만든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황폐하였다. 가묘(家廟)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맞배지붕 홑처마의 구성이며 전퇴를 개방하고 평주를 원주로 썼으나 다른 기둥들은 방주이다.

참고문헌
  • 김석규, 『치암집』.
  • 이만도, 『향산집』.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