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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암(肯菴)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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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긍암(肯菴)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42.5x68.0x6
  • 건물명 긍암(肯菴)
  • 공간명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고산서원 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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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암(肯菴)

긍암(肯菴)


긍암(肯菴)은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 대산(大山)종택 아래에 있는 긍암(肯菴) 이돈우(李敦禹, 1807~1884)의 서재 편액이다. ‘긍암’은 『서경書經』, 「대고大誥」의 “만약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작정하여 이미 그 규모를 정했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당기(堂基)를 마련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랴? [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弗肯堂 矧肯構]”라고 한데서 나온 말로, 자손이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행서체이다.

크지 않는 편액으로 실내 서재용이라면 주변과 상황에서 좋은 관계를 구성할 수 있다. 실내용으로는 소란스럽지 않은 다소곳하면서도 정갈하면 좋겠다. 주변 공간이 아침 숲에 온 듯 고요하다. 주인의 성품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편액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소개


이돈우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시능(始能), 호는 긍암(肯庵)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고손으로, 아버지는 이수응(李秀應, 1789~1864)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생원 권의도(權義度)의 딸이다. 안동부 일직현 소호리(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가정세제(柯亭世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남다른 재질과 기골이 빼어났는데, 증숙조인 면암(俛庵) 이우(李㙖, 1739~1811)는 이돈우의 손금을 보고는 “이 아이는 반드시 문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10세 때 『소학』을 배우고 12세 때 『대학』을 배웠으며, 14세 때 『맹자』를 통독하는 등 사대부 집안의 교육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갔다. 24세 때 정시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여 이듬해 조부 면재(俛齋) 이병운(李秉運, 1766~1841)의 명으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하에 들어갔다. 35세 때 숙조인 소암(所庵) 이병원(李秉遠)이 사복관에 복귀되었을 때 곁에서 4~5개월을 모시면서 교제와 출입을 삼가니 지우(知友)들이 모두 공경하고 각별하게 생각하였다. 41세 때 고산서원에서 『대산선생실기大山先生實紀』 간행을 감독하였다. 44세 때인 1850년(철종 1) 2월 증광시에 급제하여 5월에 가주서가 되었고 8월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48세에는 『주자연보朱子年譜』를 가려 뽑았고 『가학집요家學輯要』를 편찬하였다. 50세인 1855년 류치명이 호남의 지도에 유배되었는데 천리 먼 길을 따라갔다가 되돌아올 때 류치명이 절구 3수를 지어 주자 이돈우는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이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유배 갈 때 지은 「만하滿河」 4장에 차운하였다.

1860년에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엔 홍문관수찬에서 교리로 옮겨졌다. 1867년 지평, 헌납, 장령, 사간, 응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870년에 남학교수에 제수되었는데, 이전에 제수받은 모든 명을 받들지 않는 것은 신하된 직분이 아니라고 여겨 어쩔 수 없이 나아가 사은숙배하였다. 이에 부수찬으로 경연이 입시하니 왕이 “먼 지방의 유신(儒臣)이 노구를 이끌고 대궐에 오셨으니 진실로 귀한 일이오.”라고 하고서는 특별히 형조참의에 제수하였다. 1874년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지방에 있었기에 체직되었다. 1877년 응지로 「삼강구목소三綱九目疏」를 올렸는데 무릇 1만여 자에 달하였다. 1882년에 이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직분에 넘치는 은혜라고 여겨 사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1883년 용담사에서 『정재집定齋集』 간행을 지켜보았고 1884년 귀담서당에서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강론하였다. 그해 여름 병이 나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돈우는 후학 양성에도 관심을 가져 73세에는 고산서당, 74세에는 고운사, 75세에는 임천서원 등 여러 곳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문집으로 『긍암집肯庵集』 20권 1책, 부록 2권 1책이 전한다. 문집 중 58세 무렵 쓴 편지 「여강란형서與姜蘭馨書」는 인의예지가 성(性) 가운데에서 나온다는 의심을 논한 것이고, 「답윤사선최식答尹士善最植」은 태극의 의심난 뜻을 논한 것이다. 59세에 태극도설(太極圖說),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칠동이변(四七同異辨) 등에 관련하여 『호상문답湖上問答』을 저술하였다. 기타 『용학이동조변庸學異同條辨』, 『예의변답禮疑辨答』, 『이기무한량설理氣無限量說』, 『이기체용설理氣體用說』 등의 저술이 있다.

소호리는 망호리로도 불리는데, 마을 앞에 커다란 호수가 있고 고려 때 시랑 벼슬을 지낸 소씨(蘇氏) 성을 가진 이가 이곳에 살 때 마을 앞에 커다란 호수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로는 한산이씨(韓山李氏)와 대구서씨(大邱徐氏)의 동성마을로, 북쪽으로 향한 음지마을과 남쪽으로 향한 양지마을이 있다. 대산종택은 대산 이상정의 종택이며 뒤쪽에 대산의 불천위 사당도 있다. 이상정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외증손이자 밀암(密菴) 이재(李栽)의 외손으로 퇴계학을 한층 더 세상에 알린 학자이다. 그의 학문은 아우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과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를 통하여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에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계승되었다. 수은종택은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의 종택이며, 이홍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0대손으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외손자다. 병자호란 때는 안동의 의병장이 되어 남한산성으로 출발하였으나 이미 강화한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그는 안동 입향조이기 때문에 수은종택을 한산이씨 안동종택이라고도 한다. 이 종택 사랑채에 관가당(觀稼堂)이란 당호가 걸려 있는데 이것은 수은의 증손자이자 대산의 아버지인 이태화(李泰和)의 호이다. 종택 뒤에는 수은의 불천위 사당이 있다. 수옥정은 1953년 지은 것으로, 이홍조가 당시 후학들을 강학하던 곳에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대산종택은 넓은 마당을 앞에 두고 뒤쪽에 안채를 배치하였으며, 안채 우측에 방형의 담을 둘러 사당 공간을 따로 마련하여 종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실의 구성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을 들이고 그 앞에 부엌을 두었다. 대청 우측에는 세로 3칸에 3개의 방이 연이어 있는데 위쪽의 방을 태실(胎室)이라 부르며 중사랑방으로 사용하였고 나머지 2칸은 제례시에 사용하는 방(빈소)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 『긍암집肯庵集』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안동오면 뵈줄게』
  • 『안동의 문화유산』
  • 『안동의 지명유래』
  • 『안동의 명현당호 2』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